양치기 소년과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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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썰전열전

양치기 소년과 조선일보

by 깨알석사 2019.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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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우화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을 반복하다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는 사람들이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아 결국 양들이 늑대에게 잡아 먹힌다는 이야기다. 우화 대부분이 그렇지만 거짓말이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지, 어떤 댓가를 치루게 되는지에 대한 교훈을 준다. 짧고 굵은 가르침이 있다. 

그런데 초등학생 시절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처음 접한 나는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거짓말을 하는 양치기 소년이 잘못된 건 맞지만 이야기는 애초에 늑대를 비난하거나 늑대를 악의 중심으로 보지 않았다. 양치기 소년이 존재하는 이유도, 거짓이든 진실이든 사람들이 소년의 말에 호들갑을 떠는 이유도 알고 보면 모두 "늑대" 때문이고 그 "늑대"가 피해를 (=나쁜 행위) 주기 때문이다. 양을 잡아 먹고 심지어 사람에게도 덤빌 수 있으니 늑대를 조심해야 하는 건 달라지지 않는데 이야기 속 소년의 거짓말은 그 자체로 늑대가 나쁜 것이 아닌 소년의 거짓말이 나쁜 것의 실체이자 중심이 되었다.

늑대에게 키우는 양이 잡아 먹힌다는 건 이야기 전개 상 굉장한 손실과 피해를 의미한다. 요즘으로 따지면 범죄다. 그런 걸 예방하고 경고(경보장치)하기 위해 구성 되어진 것이 양치기 소년일 것이다. 맥락만 놓고 보면 이야기는 소년의 거짓말이 부른 참상과 그 거짓말의 댓가에 대한 가르침이 제일 크지만 소년의 말(외침)과 상관 없이 나쁘다는 본질이 변하지 않는 건 "늑대"의 기습이고 늑대의 약탈 행위다. 비록 철부지 어린 나이의 발칙한 발상이었지만 내 눈에는 양치기 소년 보다 늑대가 더 나쁜 주체였고 양치기 소년이 잘못한 걸로 결론이 나와야 한다면 소년과 함께 늑대도 잘못한 결로 결론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우화 이야기의 실제 결말에서도 늑대는 양을 잡아 먹음으로 인해 우리 시선에서 나쁜 행위(본질)을 완성한다.

늑대 - 양치기 소년 - 양 - 마을 사람의 구도에서 따지고 보면 나쁜 역할(악)은 시작부터 오히려 정해져 있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보가 아닌 이상 늑대는 양치기 소년 이야기에서 메인 악당이다. 양치기 소년이 비록 거짓말을 반복함으로 인해 마을 주민에게 혼란을 야기 시켜 늑대에게 양들이 잡아 먹히는 불상사가 발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늑대의 행위가 정당화 되거나 양치기 소년의 잘못에 견주어 나쁜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볼 이유가 없다. 

군대로 따지면 초병이 경계를 실패하거나 경보 장치를 수시로 잘못 눌러 경계 임무자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했고 결국 그로 인해 적에게 국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과 비슷한 구조인데 그런 과정에서 초병의 실수가 결정적이라 해도 애초에 "적"이 침략할 마음이 있었고 적이 피해를 실제로 주었다면 국민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건 초병이 아닌 적이어야 한다. (혹은 경계를 실패한 초병과 적이어야 한다)

중요한 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보면서 (나쁘다고 하면서) 늑대의 약탈은 나쁘다고 규정하지 않고 넘어 간다는 것이다. 초병의 경계 실패로 침략이 벌어졌다고 해서 적은 아무 잘못이 없고 초병이 다 잘못한 걸로 결론날 수 있는 이야기, 초병의 실수를 두고 적과 다름 없이 큰 잘못된 (나쁜) 행위로 묶어 둘을 동일 시 한다면 몰라도 양치기 소년 이야기만 놓고 보면 나라를 침범한 적은 잘못이 없고 경계를 실패한 초병만 잘못이 있는 걸로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더 깊게 해석하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상황을 "더 악화" 시켰고 피해를 최소화 하는데 방해를 했다는 것이 본질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물론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 구성만 놓고 보면 이렇게까지 볼 필요는 없지만 원래 악당이 있고 그 악당의 약탈에 있어 (최소한의 약탈도 가능하다고 하면) 소년은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면 소년의 역할은 피해를 최소화 하는 역할일 뿐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결과처럼 완전 예방은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욕 한다. 최근에는 일본 경제 보복과 관련해 여러가지 빌미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근거 없는 보도가 일본 측에 인용) 일본대사관 앞 상황처럼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시위를 하는 일도 생겼다. 물론 그런 것과 상관 없이 조선일보는 오랫동안 꾸준히 "폐간"해야 하는 대상으로 사람들에게 지목 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새삼 놀랍거나 달라지는 건 없다. 일본어판 관련해 불거진 문제에서도 사람들은 "조선일보가 왜?" 라는 생각 보다는 "조선일보가 또?" 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 심한 매국 행위 언론질을 한다고 해도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와 마찬가지로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생각하지 범생의 일탈로 보는 시각은 없다.

그런데 정말 조선일보가 사라지면 (조중동이라는 말과 묶어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포함) 세상이 아름다워질까?

대부분은 "그렇다"라고 하겠지만 정작 나는 "아니올시다"로 생각을 한다. 애초에 구독자의 성향에 맞게 구독하는 신문사의 성향이 있는 것처럼 그 성향은 양쪽 구도가 되어야 정상이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진 일방 구도가 되면 기대하고 희망하는 그런 세상은 오기 힘들다. 문제는 "비율"인데 그 구도 비율에 있어 중심이 되는 사람들의 비율이 얼마이고 어느 위치에 있느냐가 더 중요한 포인트다.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성향의 비율이 적정선을 가졌느냐 적성선을 넘어 과도한 선 긋기를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조선일보는 김대중의 반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며 언론사 스스로 그렇게 행동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반대 쪽이었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들 편에 섰다. 중요한 건 그 색깔이 확연해서 오히려 구독하기 편하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색깔을 감추고 선동하는 것과 달리 색깔이 뚜렷하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없다. 거부감이 있는 쪽은 대부분의 해당 기사를 "반대" 입장으로 보고 의미 해석을 하면 되고 선호하는 구독자는 그걸 그대로 받아 들이면 되기 때문에 기사에 숨겨진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를 상당히 줄여 준다. 각자의 취향이 있듯 선호하는 성향의 언론 방향을 찾아 보면 그만인 것이다.

조선일보를 보면 학을 떼는 사람이 있고 한겨레를 보면 학을 떼는 사람이 있는데 오히려 그런 색깔이 뚜렷하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고 기사를 읽기 이전부터 단단히 마음 가짐을 하면서 속임수가 없는지를 살펴 보게 되어 있다. 정작 위험한 건 이들 색깔이 뚜렷한 매체가 아니라 색깔이 없는 매체, 혹은 색을 감춘 매체다. 사람의 마음을 방심하게 만들어 소리 소문 없이 파고드는 형태, 색이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듯 하는 액션을 취해 사람에게 의심을 사지 않아 자신들 입맛에 따라 조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언론은 반드시 대중의 심리를 반영하고 구독자를 만족 시켜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색이 없는 팩트 전달 위주의 언론사는 그 지향점이 아무리 중립이어도 성장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칼럼과 사설이 그 신문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큰 것도 그래서다.

물론 조선일보가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 생각이 있는 사람은 그런 나눠 보기가 가능하지만 신문 구독에 익숙치 않다면 맹목적인 주입식 기사가 잘못된 사상과 편견을 갖게 만들 수 있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편협된 일방의 사고가 무차별적으로 입맛에 따라 가공되어 전달이 되면 구독자도 그에 맞게 편협된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어 처음부터 제대로 된 방향과 언론 역할에 충실한 것이 선행 되어야 하는 것도 맞다. 색깔이 뚜렷해 보기가 쉽다는 건 분명하지만 정작 그 색깔을 쉽게 판별하지 못하거나 안목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색깔이 보이지 않고 뉴스가 전하는 다양한 숨겨진 메세지만 보기 때문에 잘못된 구독이 될 순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보수 매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고 보수 매체의 전매 특허일까.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국일보, 서울신문, 한겨레, 국민일보, 세계일보, 문화일보, 여기에 더 나아가 한국경제신문, 매일경제신문, 아시아경제신문, 조금 더 나아가 오마이뉴스 등 각 신문을 보고 편집자가 추구하는 방향과 성향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이나 될까. 오랜 구독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논조만 보고 판독이 되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 그런 역량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일단 나라가 작아 다루는 사건/사고 이슈가 비슷한 편이면서 (개별 특종이 많지 않다는 뜻) 칼럼이나 사설 등 오피니언 뉴스를 보지 않는 경우라면 더더욱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남이 규정한 색깔에 따른 차이는 인지해도 자기 스스로 색깔을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딸이 사위될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마음에 안든다. (이런 경우가 많다) 결혼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딸은 결국 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후 과정을 보면 장인, 장모는 대부분 사위와 잘 지내거나 애틋한 감정을 갖는다. 결혼을 반대했으나 나중에는 잘 지내는 경우가 실제로 많다. 결혼 전 보여지는 남자의 여러가지 단서와 외부적인 요소만 보고 판단한 것과 달리 싫든 좋든 결혼 과정에서 오랜 시간 지나고 보니 사위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직접 겪어보고 사람 됨됨이를 곁에서 오래 봤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쭉 지내다 보면 서로 맞는 경우가 많다. 학교 선생님의 경우도 마찬가지, 학기 초에는 구분 없이 다 똑같은 아이들이지만 오래 지나다 보면 각자 아이들의 특징과 성향이 보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게 되어 있다. 사회 생활, 직장에서도 가끔 들을 수 있는 말이 "오래 지켜 보니" "쭉 지켜 봤는데" 와 같은 말이다. 단기간이 아닌 장기간 오래 지켜보면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그 다른 모습이라는 건 대부분 그 사람의 "실체" "본질" "본성"을 말한다. 처음에는 별로 였는데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다"라고 결론 짓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따져 볼 수 있는 건 조선일보를 까는 사람 치고 조선일보 구독자이거나 조선일보를 장기간 구독한 이력이 있는가하는 부분이다. 오래 지켜 본 것과 단편적으로 지켜 본 건 분명 다르고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곁다리 식으로 멀리서, 혹은 파편적으로 전달되는 몇 가지 기사만 가지고 매체 전체를 평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정말로 하나의 색깔만 갖고 있는지 자신 할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이다. 더욱 중요한 건 반대 성향의 일간지도 마찬가지, 직접 겪어 본다는 건 오랜 시간 정기 구독을 통해 그 실체를 직접 느껴 본다는 것이고 오래 지켜 본다는 건 "관심"을 두고 중간에 텀 없이 논조의 방향 흐름을 본다는 것인데 사람이나 언론사나 내가 직접 경험해 보고 깨치지 않는다면 편파적인 보도에 의한 왜곡된 시선을 갖을 수 밖에 없어 아 다르고 어 다름에도 무조건 아로 보고 무조건 어로 보게 되는 일이 생긴다. 그렇게 구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안다고 맹신하거나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신"이다. (혹은 사기꾼이다)

NIE 신문 활용 교육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신문은 두 색깔을 동시에 놓고 봐야 한다. 하나의 색깔만 보거나 하나의 색깔만 선택해서 (내 취향에 맞는)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반대되는, 내 성향과 반대 쪽에 있는 신문의 글을 봐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진보 성향의 사람에게는 그래서 조선일보가 있어야 하고 반대로 보수 성향의 사람에게는 한겨레, 경향신문, 미디어오늘, , 기타(민중의 소리,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등)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그래야 내가 보는 것이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혹은 내가 보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믿고 내가 의지하는 언론이 절대적일 수 없는 것처럼 맹신하는 것 만큼 위험한 것도 없는데 색깔이 있어도 언론사주와 편집인의 사상에 의해 언제든지 왜곡될 수 있는 건 보수 뿐 아니라 진보 매체도 동일하기 때문에 비교(교차) 구독을 해야 맞는 것인지 비교 없는 일방 구독은 잘못된 인식을 갖게 만들 수 밖에 없다.

언론사도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각자 확연히 다른 모습과 포지션을 갖는다. 그걸 구분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오래" 지켜보면 보인다. 사람처럼 오래 지켜보면 그 본성과 자질이 조금씩 눈에 띄는 것처럼 언론사도 관심을 두고 오래 지켜 보면 분명 공통점과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예전 스승이 나에게 신문 구독 노하우를 전수할 때 조중동과 함께 한겨레와 경향은 반드시 쌍으로 묶어 읽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지만 몇 년 이상 꾸준히 보면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라 하였는데 중요한 건 파편적으로 보지 말고 정기 구독하여 반드시 지면 구독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 때는 온라인 매체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는 아니라서 당시의 정기구독/지면구독은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에서 단편적으로 구매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고 필요할 때 마다 (어쩌다 보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집에서 신문 구독을 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예 신문 구독을 하게 된 것이 조중동과 경향, 한겨레, 매일경제 6가지였다. 

생각보다 꽤 많은 구독 매체와 양이지만 신문도 정독과 속독이 있다는 걸 안다면 수량이 많다고 해서 덜 읽거나 하는 건 없다. 물론 이후 안목이 늘어나면서 3개로 줄였다, 정기 구독은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매일경제로 줄이고 나머지는 틈틈히 따로 매대에서 구매하여 보았는데 정독을 해야 할 기사와 속독을 해야 할 기사 자체가 분명하고 정독을 해도 구독력이 오래 되면 속도는 줄어들기 마련이라 요령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인터넷으로 신문을 쉽게 볼 수 있게 되면서 정기 구독 비율을 차츰 줄이게 된 점도 있다. 하지만 지면으로 직접 보는 것과 모니터로 보는 건 다르기 때문에 지면 구독은 지금도 진행 중인데 그건 영상 발달 시대에도 불구하고 책(도서)이 주는 의미가 다르다는 걸 아는 분들과 마찬가지로 지면의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신문 구독을 시작해 지금까지도 쭉 놓치지 않고 보는 신문 중 아무래도 튀는 녀석을 뽑자면 매일경제(매경)신문이다. 신문 자체가 경제 전문지이기 때문에 정치, 사회가 다른 신문처럼 경제 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 바로 그 점이 중립점에서 보기 편해 선택을 했고 정치와 사회 문제를 다루어도 경제와 맞물려 연동해 보는 시각이 크기 때문에 경제 뉴스는 물론 제3의 시선에서 정치/사회를 보기 위해 일찍 선택했던 뉴스 매체다. 물론 지금은 색동옷을 입고 나서려는 모습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빠른 시일 안에 손절할 대상이 되었지만 말이다.

TV조선과 채널A, JTBC처럼 매경도 MBN 이라는 종편을 소유하고 방송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확실히 종편 방송에 합류하면서 TV조선/채널A/JTBC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방송이 모두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에 적(소속)을 두고 있는 것처럼 MBN 역시 매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기존 매경TV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색깔 방송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중립적인 위치에서의 제3 시선은 내 입장에서는 이미 벗어난 상태다. (매경TV는 케이블 방송사 채널로 따로 운영) 그 방송에서의 정치적 논조가 어느 순간 매일경제신문에도 깔리기 시작했고 그게 눈에 보인다는 것이 문제, 한경은(한국경제신문) 일찍이 색을 보였고 서경은(서울경제신문) 내 수준을 만족 시키지 못했으나 최근 아경(아시아경제)이 내 눈높이에 맞아 그나마 선전하는 듯 하지만 내공이 살짝 아쉽다, 

우리말 첫소리 퀴즈 문제 - 남편이라고 주어진 단어와 연관되는 초성의 단어는? (90% 이상이 동일한 생각을 한다고 한다), 고정화 된 인식이 사회 전반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는데 남편과 상관 없이 초성 자체가 연상 시키는 단어는 대부분 한 가지다. 거기에 남편과 엮어주면 웃음(미소)과 함께 자신이 생각한 단어와 더 가깝게 결부 시켜 정답이라 확신하게 되는데 가끔 우리는 그게 아님에도 사회 단면에 의해 주입된 고정 관념이 크게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처음 시작점에 꺼냈는데 조선일보는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 속 "늑대"가 될 수도 있고 "양기치 소년"의 자리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건 결국 둘 중 하나는 분명 하다는 것과 두 대상 외 나머지 (양이나 마을 사람) 대상의 자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게만 보면 악당의 포지션이 맞고 그렇게 바라 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 속 소년은 전부 "거짓말"만 한 것도 아니라는 걸 알 필요성이 있다. 항상 거짓말만 일삼고 멋대로 행동하다 보니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들어주지 않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제3자의 관점에서 소년 이야기를 내려다 보면 소년은 거짓과 참을 모두 말한 사람이지 거짓말만 하는 아이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따져 볼 것은 조선일보라 해서 "항상" 틀린 말만 한다고 할 수 없고 진보 매체라 해서 "항상" 옳고 맞는 말만 한다고 맹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타율은 높지 않아도 때로는 참말을 할 때도 있다. 근데 그게 가끔 홈런을 친다는 것이 바로 생명유지 장치의 비밀이다. 조선일보를 믿지 못한다면 한겨레, 경향도 믿을 이유가 없다. 둘 다 믿거나 둘 다 못 믿거나 해야지 둘 중 하나만 믿는다면 한 쪽의 이야기에만 치우치는 과오를 범하는 건 똑같다. 내 경우는 둘 다 못 믿는 경우다.

조선일보는 연령대를 따지지 않고 까인다. 사실 그게 장점으로 부각될 때도 있다. 잃을 것도 없고 더 이상 나쁜 욕을 먹을 것도 없다. 있는 욕은 다 먹는다.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할 말 못 할 말이 없다. 까일 걱정을 안하니 하고 싶은 말을 내 뱉는다. 그점이 때로는 무차별적인 언사와 논쟁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점이 때로는 남이 쉽게 하지 못하는 말을 거침 없이 내 뱉는 무기가 된다. 남 눈치 안 보고 무대뽀로 나가도 어차피 잃을 것이 없기에 할 말 다 한다는 것인데 그게 때로는 속 시원한 사이다 발언으로 이어질 수 있어 대중에게 먹힌다.

많은 사람들은 노땅, 꼰대, 노령자들이나 보는 신문이라 무시하지만 실상 언론 플레이 방식과 위치 자체가 싫든 좋든 사이다성 발언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치에 시달리고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일본의 보수 매체가 요즘 더 인기를 얻고 미국의 보수 매체가 인기를 얻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겉으로는 쓰레기 매체라고 욕하지만 3할 타율을 무시할 수 없어 가끔 치는 홈런성 타구에 되려 젊은층이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다.

시소를 보고 사람들은 중심을 잘 잡아 가운데 균형을 잡는 모습을 기대하지만 모든 시소는 그렇게 될 수 없다. 반드시 한 쪽 어딘가에 치우쳐 있게 된다. 이 때 사람들은 이걸 자꾸 균형 맞춰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만 하려 하는데 그렇게 하면 사실 "시소" 본연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시소 자체는 그렇게 쓰라고 만들지 않는다. 무게 중심을 잡아 균형을 맞추는 놀이가 아니라 서로 한 쪽으로 왔다 갔다 오르락 내리락 하게 만든 것이 시소이기 때문에 시소는 어느 쪽이든 치우치는 것이 정상이다. 단지 그것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모습이 연출이 되는데 그 때가 가장 좋은 세상의 모습과 비슷해지지만 그건 순간일 뿐 사회는 시소가 행하는 모습의 대부분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메인이기 때문에 균형 잡힌 모습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시소에 몸을 맡겨 올라간 상황에서 무게로 눌러 내려 온다는 건 불가능하다. 내 쪽의 시소가 이미 올라갔다는 건 무게가 가볍다는 뜻이니 내 무게로 눌러 봤자 내려올 수 없다. 반드시 이 때는 상대가 발차기 발돋움을 스스로 뛰어 올라야 하고 그 덕에 상대적으로 내가 내려와야 한다. 나 역시 상대가 했던 것처럼 발을 차로 올라 상대를 내려 오게 해줘야 한다. 이 말은 곧 상대가 있어야 내가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는 것이며 시소는 그래서 혼자서 놀 수 없다. 혼자 하면 그건 시소를 타는 게 아니라 제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밖에 안된다. 조선일보가 있으니 한겨레, 경향이 있는 것이고 한겨레, 경향신문이 있으니 조선일보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쁜 구도가 아니다.

하나의 색으로 통일해 단일 매체로만 존재하여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게 조선일보든 경향신문이든 어느 곳이든 결과는 뻔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일찍이 몸소 알고 느꼈다. 남한의 대한뉘우스가 그랬고 북한의 "노동신문"이 그렇다. 그것이 설령 내 성향과 같다고 해도 일방이 전달하는 단편만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런 경우다. 한 쪽 색깔 이야기만 전달하는 그런 세상을 원한다면 조선일보 폐간을 끊임 없이 요구 할 수 있지만 조중동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보수적 매체 중에서는 조선일보 만큼 가장 짙은 색채를 가진 보수 매체가 아직 없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도 조선일보 만큼은 되지 못한다. 물론 통일이 된 대한민국이라면 난 조선일보 폐간에 한 표를 던진다. 그러나 남북한이 갈리고 이념 전쟁이 치닫는 상황에서 김정은을 믿는 것보다는 조선일보 편집장을 믿는 것이 아직은 더 낫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조건부다. 

장기 구독한 나의 주관적 평가로 치부 되겠지만 조선일보는 절대적인 신뢰를 주지 못하고 반드시 "가려서" 봐야 하는 신문인 건 맞지만 그 가려서 봐야 하는 건 국내 신문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문제다,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이 항상 바른 말만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거짓말을 서슴치 않고 하는 양치기 소년을 당분간 계속 써야 한다면 난 그 소년의 말이 거짓이든 참이든 상관 없이 그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 외칠 때마다 의심 없이 고개를 들어 일단 달려갈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소년의 외침이 있을 때마다 거짓말로 치부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일단 다른 식으로든 (다른 양치기에게 물어보든) 직접 확인해서 내 안전을 확인할 것이다. 왜냐면 이야기만 놓고 대입해 보면 아직까지는 그 만한 양치기 소년이 마을에 따로 없고 그를 대신할 만한 소년이 없기 때문이다. (보도 시스템이 확실히 강하다)

물론 그런 양치기 소년의 잦은 거짓말로 인해 내 소중한 시간과 노동력이 낭비되는 경우가 빈번하지만 어쩌겠는가, 늑대가 출몰하는 마을에 내가 살고 있고 그 늑대는 항상 매 시간 우리 마을 주변에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양을 해코지 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 본질이다.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짜증나게 하고 괴롭지만 정작 진짜 괴롭고 무서운 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아닌 늑대 그 자체다. 하필 늑대를 감시하는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소년이라 고생길은 열렸지만 교훈을 주어야 하는 우화 특성 상 이 마을의 양치기는 그 누가 하든 반드시 이 소년과 같은 거짓말을 하게 되어 있음으로 (모든 매체가 진실만 보도한다고 믿을 수 없음으로) 방가네 양치기 소년을 바꾼다 해서 달라진 건 없다. "늑대"를 제거하거나 "늑대"가 없는 세상에서 살지 않는 이상 말이다. 

앞서 퀴즈처럼 남편은 분명 애틋한 "서방님(ㅅㅂㄴ)"이지만 대부분은 다르게 답한 그것처럼 누군가에게는 그냥 천하의 "ㅅㅂㄴ"일 수 밖에 없다. 각자 보기 나름, 각자가 경험하기 나름, 반대로 남편에게 아내(마누라) 역시 천하의 "ㅅㅂㄴ"이 될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이나 학생에게는 그것이 제일 먼저 선배님(ㅅㅂㄴ)이 연상될 수 있고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는 듬직한 신부님(ㅅㅂㄴ)이 연상 될 수 있는 것처럼 자기가 보는 것에 따라 해석 여지가 달라지는 것이 세상사다. 조선일보는 차 떼고 포 떼고 보는 내 시선에도 "ㅅㅂㄴ"이 분명하나 아직까지 그 만한 역량과 시스템을 갖춘 언론사는 없다. 그렇게 까여도 10대 메이저 대표 신문사 중 최상위권에 위치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 말은 곧 조선일보가 압도적으로 잘 한다는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른 신문사들이 압도적으로 뻘짓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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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전통역사] - 당기시오 철학으로 보는 출입문을 당기세요, 당기시오, 당겨주세요, 당기라고!

[교육/전통역사] - 무궁화는 일본을 상징하는 일본 나라꽃이다? (Rose of Sharon)

[교육/언어유희] - 남을 속이다라는 뜻이지만 쓰임새가 다른 기망 VS 기만

[교육/전통역사] - 고궁 무료 관람 조건인 한복 규정에 관한 성차별과 정체성 차별에 대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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