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철학을 비틀어버린 영화 - 볼리션 : 미래를 보는 자 (Vol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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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리뷰

과학으로 철학을 비틀어버린 영화 - 볼리션 : 미래를 보는 자 (Volition)

by 깨알석사 2021.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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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론 VS 개척론

유신론과 무신론처럼 현대 사회에 들어서도 끝 없는 논쟁 명제 중 하나가 운명론(결정론)과 운명 개척론이다. 운명은 정해져 있어 바꿀 수 없다는 논리와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의 논리다. 물리학자인 뉴턴과 수학자인 라플라스 역시 결정론을 지지했던 사람 중 하나였는데 과거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가 된다는 과학적 근거로 만들어진 결정론은 (특정 운동 법칙에 의해 결과가 생성) 운명론과 결은 다르지만 과학과 철학이라는 학문적 발상과 사상만 다를 뿐 결과는 결국 정해져 있다는 걸 말하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끊이지 않는 논쟁이 되기도 한다. 

철학적 관점에서의 운명론이 아닌 조금 더 진보한 과학적 관점에서의 결정론으로 따져 본다고 해도 운명론에 대한 지지 근거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오히려 퇴보하지 않고 있는데 예를 들어 태풍의 생성과 경로는 정해져 있는 것처럼 심지어 인간이 그걸 미리 안다고 해도 (기상예보)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태풍이나 인간이나 운명이 정해짐) 정해진 경로를 (운명) 예측까지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어도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피하거나 숨어야 하는 것이 전부인데, 오히려 현대 과학 시대에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 더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반대로 중력이나 가속력과 같이 정해진 운명 (운동)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처럼 과학 기술의 발달이 운명론의 또 다른 근거가 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운명은 신에 의해 모두 정해져 있다는 자연철학에서 우주과학의 시대로 바뀌어도 마찬가지. 우주의 모든 물체 사이에는 상호인력이 있으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운동은 이미 그 전부터 결정되어 있고 어떤 법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움직인다고 본 것이 결정론인데 결정론자들이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알면 입자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사실 현대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네비게이션과 같은 과학 문명의 도구만 보더라도 결정론의 근거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위치와 속도를 계산하여 앞으로의 경로와 도착 시간을 예측)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 역시 분명하다. 

오늘 소개할 영화 "볼리션 - 미래를 보는 자" 역시 이 축에 들어간다. 부제에서 이미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자체로도 흥미로운 주제가 될 수 있는데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전제가 되어야 미래를 보고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 성립되기 때문에 미래를 본다는 것 자체가 운명론에 가깝다. 다시 말해 미래가 순간 순간의 상황과 누군가의 개척에 의해 바뀐다면 그 미래를 보거나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 되니 어차피 내가 뭘하고 어떤 생각을 하든 정해진 미래가 있다면 결국 운명 전체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래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상징한다. 바꾸려고 하면 그 바꾸려는 자체가 원래 정해진 운명이고 미리 본 미래 역시 그 바뀐 것이 예측이 되어 정해진 미래이기 때문에 결국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영화는 흑막 상태에서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 독백 내용을 자세히 들어 보면 이 논리가 더욱 명확해 지는데 운명은 정해져 있고 바꿀 수 없다는 식으로 설명을 한다. 누구보다 그걸 확신하는 건 바로 이 주인공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똑같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미래를 본다면 미래를 바꿔 보려고 시도 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 자신이 미래를 볼 수 있어 미래를 바꿔 보려 수 많은 변수와 상황 변화를 시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본 미래 모습 그대로 진행이 되었기 때문에 운명은 정해졌다고 확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애초에 미래를 본 다는 것 자체가 운명(결과)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 되니 당연히 현재와 과거를 바꾼다고 해서 달라질 수 없는 건 당연. 미래가 바뀐다면 미래를 예측하고 볼 수 있다는 말 자체가 성립 불가니 앞뒤가 맞지 않는 구조를 갖는다. 

철학 VS 과학

영화 스토리의 큰 틀은 간단하다. 주인공은 단시간 앞의 미래 상황을 볼 수 있다. 잠시 뒤 나에게 벌어질 일을 망상처럼 겪는다. 짧게는 몇 분 뒤의 상황, 길게는 몇 시간 뒤의 상황을 본다. 현실에서 그는 변변치 않은 삶을 살아가며 근근히 먹고 사는 인물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이런 능력을 가졌다면 훨씬 좋은 윤택한 삶을 살아야 정상이겠지만 어찌된 이유인지 그는 범죄자들과 어울리는 뒷 세계 사람이 되어 있었다. (로또나 주식을 했더라면 ^^) 아마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아무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으로 단기적 미래만 조각 형태로 이미지가 전달 되기 때문에 현실에서 주식 투자나 복권 당첨에는 정작 쓸 수 없어서가 아닐까 싶다. 보고 싶은 걸 보는 게 아니라 자신과 관련되어 벌어지는 일에 있어 "무작위로 전달되는 미래의 조각만" 볼 수 있는 것이 이 능력자의 한계이자 단점인 셈. 

과거 알던 지인이 다이아몬드 유통을 의뢰한다. 다이아몬드 출처가 불법적이라 비밀리에 유통하길 바라는 지인은 그의 능력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이 능력은 아주 좋은 수단이 될 수 밖에 없다. 도난 위험을 미리 알 수 있고 유통 과정에서 실수가 벌어지는 걸 주인공이 예측해 주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지 아닌지 의뢰 과정에서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로또처럼 번호를 맞혀야 하는 경우라면 쓸모 없는 능력이지만 (보이지 않으니) 당첨인지 꽝인지는 그 자체만 갖고 복권을 사는 순간 알 수 있기 때문에 당첨 여부 예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인이 주인공의 능력을 알고도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일지도) 곧 다이아몬드 역시 성공적으로 상대 매수자에게 전달만 잘 되는지 안 되는지만 알 수 있다면 딜은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이 능력자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 된다.  

집세조차 내지 못해 당장 현찰을 구해야 하는 입장에서 다이아몬드가 성공적으로 전달 되는 미래의 장면을 본 주인공은 이 제안을 받아 들인다. 수고비는 우리 돈 1억.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한다. 지인의 사무실에 있던 하수인 2명, 부하가 이 다이아몬드를 탈취하기로 결심하고 주인공에게서 약탈하려 한 것이다. (직접 겪지 않는 이상 당연하겠지만 부하들은 이 사람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죽는 끔찍한 미래를 보게 된다.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보지 말았어야 하는 미래를 보고 만 것이다. 지금까지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며 어쩔 수 없이 정해진 삶대로 살았다면 이번에는 무조건 정해진 운명을 바꾸고 미래 역시 바꿔야 하는 숙명을 안게 된 것이다.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기 때문이다. 운명론과 개척론이 맞대결을 하는 순간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다이아몬드가 탈취 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아닌 당일 낮에 알게 된 운명의 여인이 양아버지의 집에서 대신 죽게 된다. (그는 그 여자를 만났을 때 둘이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는 미래를 본다) 이 때 양아버지와 같이 창고 방에 갇혀 있던 주인공은 그녀의 마지막 얼굴을 보게 되는데 이 때 아버지가 그의 목에 주사기를 꽂으며(?) 진짜 이야기가 시작 된다. 철학과 과학이 만나는 순간이며 이 논쟁의 시작이자 결과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게 시간 여행이라는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영화가 순식간에 B급으로 보여지는 순간이기도 하고..그나마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풀리면서 약간의 허망함도 밀려오는 순간이기도 하고 말이다.

주인공은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특정 시간대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은 과거로 가지만 때로는 미래로 가기도 한다. 물론 그 미래는 과거 속의 미래이기 때문에 우리가 카메라로 보는 주인공의 시점에서는 둘 다 과거다. 이 때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데 과거 현재 미래의 구도에서 미래가 과거의 미래이기 때문에 자칫 혼동하기 쉽고 착각하기 쉽다. 또한 시간 여행 자체가 또 다른 과거의 내 모습이나 미래의 내 모습과 마주쳐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주인공 인물이 여럿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주제 자체가 시간 여행을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면 결국 주인공이 과거, 현재, 미래 3명 이상이 나올 수 밖에 없어 시간 여행 속 스토리를 잘 구분해서 봐야 한다.

내가 보는 시나리오 짜임새의 방정식 중 일정한 패턴을 갖는 형식 구조가 있다. 모든 영화에게 다 적용되는 건 아니나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주인공이나 혹은 그를 잘 아는 제3의 인물이 독백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대부분 평균 이상의 작품 수준이 많다는 것이다. 뭔가 반전이 있거나 끝에 가서 엔딩이 사람들에게 각인될 정도로 이벤트가 큰 시나리오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물론 독백으로 시작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 독백의 내용이 상당히 중요한데 그 독백 자체가 영화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이기 때문에 내용의 전달성과 함축된 표현이 이어질 시나리오의 전부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기에 영화의 핵심 정체성을 드러낼 만한 열쇠(힌트)가 있어야 하는 건 분명하다.

가끔 처음 등장한 그 독백이 결말에도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게 동일한 독백 대사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 사실 강조(반복)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영화의 모든 답은 첫 독백에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말 보다는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매력이지만 그림(화면) 보다는 말로 설명할 때 만큼 더 확실한 워딩도 없기 때문에 초반과 후반의 결정적 장면에서는 나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독백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 쇼생크 탈출처럼 말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영화 중에 그런 것이 많고 라이언 레이놀즈의 영화에서도 그런 걸 종종 볼 수 있다. 마치 우리나라 마당놀이 등에서 놀이를 시작하기 전 "여보쇼, 내 얘기 좀 들어보쇼~" 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는 그 느낌, 마무리 단계에서 "이후 이들은 이러쿵 저러쿵 살게 되었다더라~" 하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 주는 그 느낌으로 말이다.

이 영화는 사실 맨 처음 독백에서 9할의 답이 나왔다. 그 독백이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나오는데 주인공이 겪은 인생을 다 들여 다 본 이후 그 독백을 다시 들으니 답은 정확히 그의 독백 속에 있었다.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하는 순간 관객은 찜찜해진다. 분명 영화가 보여준 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개척론을 지지할 수 없다. 영화는 분명 주인공이 맨 처음 본 자신의 죽음대로 죽기 때문이다.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는 정말로 죽었냐고 물으면 또 그렇지 않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주인공의 운명 자체가 타임루프에 갇혀 돌고 도는 불교의 윤회 사상처럼 생과 사를 반복하는 걸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감흥은 극단적일 수 밖에 없다. 정말 재밌다. 정말 재미없다로 말이다. 개인적으로 난 "무척 재미있다"로 일단 간략하게 평을 내린다.

먼저 나는 이 영화 보기를 추천한다. 다음영화 기준 일반 관객 평점 6점대로 기대 이하의 점수대가 나왔지만 난 10점 만점 중 9점대로 수우미양가 중 "수", 높은 점수로 평가해 주고 싶다. 일단 주제 자체가 운명론과 개척론의 절대 맞대결이지만 그 끝과 과정을 생각보다 잘 풀어냈다는 점에서 극찬을 해주고 싶은데 기존의 타임머신 여행,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를 보면 항상 뭔가 아쉽거나 해석 상의 오류가 나오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그런 게 없다. 철학적 관점 뿐 아니라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봐도 (전문가는 아니지만) 개연성이 충분하며 앞뒤 이야기의 전개가 잘 떨어진다. 스토리의 완성도가 생각보다 높다는 것이다. 일단 결말 자체가 깔끔하다.

영화의 묘미와 운명론의 재해석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위 내용까지만 보고 영화를 다 본 사람이라면 이후 글을 봐도 상관 없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지금부터 쓸 이야기를 보게 된다면 영화의 재미는 무척 반감될 것이고 흥미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때론 이해되지 않거나 오류라고 생각한 장면이 해결 되면서 재미를 더 보강하는 측면도 있을 수 있지만 영화처럼 미래를 알면 현재의 삶이 생각보다 재미있지 않고 따분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영화 스토리도 스스로 깨우치지 않고 미리 알고 본다면 재미가 반감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나는 이 영화를 4명과 함께 봤다. 보는 내내 나는 속으로 "이걸 이렇게 풀어 나간다고? 와우" 외쳤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다음영화 평점 6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 하다. 일단 2명은 간단한 이야기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서 재미가 없었다고 했고 다른 1명은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하며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되기 위해 억지스러운 요소를 너무 많이 넣었다고 평을 내렸다. 다른 1명은 흔하디 흔한 뻔한 줄거리라며 적당한 흥미거리의 킬링타임 영화로 평을 냈다. 점수로 따지니 모두 7점대로 다음영화 6점대와 비슷하거나 약간 높은 수준 (다음영화에서도 정확히 6.7점으로 6점 후반대)

하지만 지인들 입에서 운명론과 개척론의 논쟁은 없었다. 영화가 보여주고 말하려 한 것은 정작 그 내용인데 이들이 주목한 것은 주인공의 시간 여행과 그 과정에서 결말로 이어지는 것들의 개연성. 그게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단지 그건 운명론과 개척론의 논쟁을 다룸에 있어 상대방을 설득하는 과정의 도구로 쓰였을 뿐인데 관객들은 그것에 너무 집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모든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자와 모든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 바꿀 수 있다는 개척론자들의 주장을 과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그 둘의 핵심 쟁점과 논점을 파고 들어 누구 말이 더 옳고 누구 말이 더 사실적인지를 따진 영화라 볼 수 있는데 정작 그것 보다는 공상 과학의 아류작으로 보았다는 시선이 더 많았다는 것이, 더 많게 느껴졌다는 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 하지만 그 도구가 아닌 그 도구가 쓰여지게 된 결정적 이유인 철학적 고찰 뒤의 운명론과 개척론의 중심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그 단점조차 충분히 극복하고 볼 여지가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은 3번의 시간 여행을 한다. 우리가 처음 영화를 볼 때 만나는 주인공은 마지막 엔딩 장면을 빼면 1번 메인 주인공이다. 물론 엔딩을 장식하는 주인공 역시 과거 여행을 통한 주인공 본인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죽었어도 죽지 않았고 죽지 않았어도 분명 죽었기 때문에 그가 그다. 하지만 인물이 나뉘어지면서 운명도 바뀌고 삶도 바뀌었기 때문에 운명론과 개척론은 결말에서 다시 나뉜다. 운명론자 입장에서 보면 이건 운명론을 다룬 영화이고 (그는 미래에서 본 그대로 죽는다) 개척론자 입장에서 보면 그는 다시 살아 다른 생을 살기 때문에 개척론을 다룬 영화가 된다. (정해진 운명 틀 안에서 그는 결국 미래를 바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론 보다는 개척론을 믿는다. 운명은 모두 정해져 있다기 보다는 스스로 바꾸어 만들어 간다고 믿는 것이다. 나와 영화를 같이 본 사람 4명도 그 점은 모두 동일했다. 영화도 사실 표면적으로 운명론을 다루지만 결말을 보면 개척론에 힘을 더 싣는다. 앞뒤가 안 맞는 논리이지만 그걸 맞는 논리로 만든 것이 바로 이 영화, 즉 정해진 운명론도 틀리지 않고 정해지지 않았다는 개척론도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영화다. 정해진 운명의 틀 안에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걸 과학적 도구를 이용해 상황 묘사를 한 것인데 그 미래가 현재의 미래가 아닌 과거의 미래라면 그 미래가 나에게는 과거가 되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즉 운명론이 말하는 운명은 그대로 진행 되지만 그 정해진 운명 안에서의 개척 역시 가능하며 그 바뀐 운명은 결국 또 다른 정해진 운명으로 귀결 되기 때문에 둘은 사실 뗄 수 없고 떼어지지도 않는다는 논리의 재합성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영화

쉽게 정리하면 정해진 원래 삶이 있다고 해도 (운명론) 그건 바꿀 수 있으며 (개척론) 그 바뀐 삶은 사실 원래 정해진 운명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개척론으로 바뀌게 된 삶 역시 이미 과거에 정해져 있었다는 것) 운명론의 진리는 물론 개척론의 진리 역시 깨지지 않는 것이다. 경우의 수를 볼 때 둘 다 틀리거나 둘 중 하나가 맞거나 둘 다 맞거나에서 이 영화의 경우는 둘 다 맞다고 하는 경우인 것이다.

운명론으로 따지면 우리는 쉽게 사주팔자를 따질 수 있다. 사람은 사주를 타고 나며 그 사주대로 산다고 알려져 있다. 팔자는 고치지 못한다, 그래서 나름의 변수, 변칙으로 부적이라는 걸 쓰지만 그렇다고 해서 운명 자체를 거스를 순 없다. 결국 그 운명을 바꾸려면 그 운명 자체를 믿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오늘의 운세도 마찬가지, 정해진 운세가 있어 나이에 따라, 생일에 따라 요일에 따라 정해진대로 산다고 하는 것이 운명론이다. 운명론을 믿지 않아도 실제로는 운명론대로 사는 경우가 흔한 것도 과거 오래전부터 내려온 관습과 풍습이 있어서다. 타로 카드, 별점 등 점을 보는 행위도 마찬가지, 운명을 믿지 않아도 그것에 혹한다면 당신은 운명론을 완전 배제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결혼을 할 때 궁합을 보았다면 결국 당신도 운명론에 표를 던진 것과 마찬가지다.

장기를 둘 때 대부분 실력대로 한다고 하지만 사실 장기도 바둑처럼 정해진 "수"가 있다. 어느 타이밍에 어느 말을 움직이면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고 그 때 나는 어떻게 움직이면 된다는 사실상의 "룰"이 이미 존재한다. 다만 그 경우의 수가 무척 많아 그걸 다 외우기 힘들 뿐이다. 물론 바둑에 비해서는 그 경우의 수가 적다. 특정 패턴으로만 움직이는 말이 주어지고 그 말의 수가 제한적이며 움직이는 수 역시 정해져 있어 바둑과는 차이가 크다. 하지만 바둑과 달리 외울 수 있을 만큼 수를 외운다면 웬만해서는 지지 않는다. 말의 움직임이 정해져 있어 반드시 상대방의 말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차를 먹고 싶다면 차를 먹는 수가 있고 포를 먹고 싶다면 포를 따는 기술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 암기력을 가진 자를 우리는 타짜라 부른다) 당신이 어떤 액션을 취하든 상대가 그 수를 쓰면 반드시 포를 잃고 차를 잃게 되어 있다. 그 회피하려는 변칙조차 다 수에 감안하여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사주팔자는 내 사주가 근간이기 때문에 타인의 사주는 개입되지 않는다. 궁합의 경우에는 상대방과의 결합에 의해 점을 보지만 사주팔자 자체는 어떤 친구를 만나고 어떤 가족과 어울리고 어떤 친인척과 구성을 이루고 누굴 배우자로 삼으며 내 자식 사주는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영향을 주는 여러가지 변칙,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사주팔자가 100% 완벽하게 떨어져서 놀라운 예지력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타로 역시 마찬가지, 무엇보다 그 사주팔자를 해석하기 위해, 타로 카드의 점술을 해석하기 위해 점쟁이를 만나는 그 자체도 변칙 중 하나가 되는데 그 만남으로 인해 사주 해석과 사주의 향방이 달라질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점쟁이의 해석 개입) 그 자체도 운명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사실상 사주에는 점쟁이의 개입이 예지되지 않기 때문에 변수로 작용될 소지는 무척 많다.

장기 역시 마찬가지. 상대를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당연한 놀이지만 어떻게든 내 말을 지키고 왕을 보호하기 위해 무조건적인 방어태세를 취해 말을 모두 모아 최대한 방어만 한다면 상대는 그것까지 고려된 경우의 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게임에서 무조건 이긴다고 장담할 순 없다. 장기의 경우 상대방이 공격과 방어를 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대표적인 경우의 수를 뽑아 쓰는 경우라 공격만 하거나 공격과 방어를 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방어만 하는 경우 (상대를 이길 생각이 없다는 뜻) 게임 진행이 되지 않아 수를 쓰기 어렵다. 졸만 계속 좌우로 한 칸씩 움직이거나 궁의 "사"만 움직여 시간만 허비 시키는 경우 등 이기려고 만든 게임에서 반대로 움직인다면 (개척론) 결국 운명은 (정해진 수) 바뀔 수 밖에 없다. (이기거나 지거나가 아닌 무승부)

태풍이 오는 건 지금도 예보와 예측이 가능하다. 비가 이번 달에 올지 말지, 온다면 얼마나 올지 예측도 가능하다. 결정론처럼 과거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가 되는 과정을 이해했다면 예측은 분명 가능하다. 결국 그런 예측이 가능하다는 건 결국 과정이 공식처럼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과정의 흐름을 보고 미래를 예측한다면 결국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번 주에 비가 올지 말지, 오늘 비가 올지 말지는 예측할 수 있으나 어느 지역에 몇 시간대에 비가 얼마큼 올지는 현대 과학에서도 예측하기 어렵다. 비가 내일 온다는 걸 예측하나 비가 내일 몇 시에 와서 몇 시에 끝나고 다시 몇 시에 시작되는지는 모른다. 큰 틀은 운명론처럼 정해져 있어 알아내기 쉬우나 작은 틀은 개척론처럼 수 많은 변수가 작동해 알아내기 쉽지 않다. 물론 그 작은 변수를 끊임 없이 추적해 그 다음의 큰 틀을 예측하나 결국 그 큰 틀에서 또 다른 작은 변수들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운명과 개척은 상호 대응이 아닌 상호 협력이 될 수 밖에 없다. 둘은 공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영화가 이걸 담고 있다.

오류라고 착각할 수 있는 장면과 논리의 재구성

1. 다이아몬드는 분명 잘 전달되는 것으로 미래를 예측했는데...

초반 주인공은 분명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가 다이아몬드 전달 의뢰를 받을 때 다이아몬드가 잘 전달 되었다고 설명하고 실제로 그런 뉘앙스의 미래 암시 장면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건 잘못된 스토리라 생각할 수 있다. 당연히 이후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별 다른 변수 작용 없이 원래 부하들이 다이아몬드를 탈취하려 들고 그는 죽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당연히 책상 앞에서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 다이아몬드가 성공적으로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그 자리에서 부하들이 다이아몬드를 노린다고 따로 말하고 룰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이건 오류가 아니다. 애초에 그가 겪은 미래의 모습은 단편적이고 정확하지 않다. 주인공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와도 연계될 수 있는데 미래가 보여주는 그 장면의 정확도가 실제로는 그렇게 높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장면이다. 반면 본인이 총을 맞고 죽는 장면은 단편이라고 해도 명확하기 때문에 그건 부정할 수 없는데 사실 처음 다이아몬드 전달 의뢰를 받는 장면을 꼼꼼히 보면 그는 다이아몬드를 손에 쥐는 장면과 함께 전달을 의뢰한 지인의 "퍽킹루야" 외침을 듣고 (오케이, 좋았어 이런 뉘앙스로 해석될 요지) 성공적으로 전달했다고 착각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의뢰자가 퍽킹루야 하며 (퍽킹+할렐루야) 신나하는 소리를 듣고 추측했던 것인데 미래를 보는 사이 멍 때리던 그의 표정을 본 지인이 몇 초 뒤 미래를 봤냐? 어때라고 물었을 때 전달이 잘 되었다고 하자마자 그가 외친 말이 바로 "퍽킹루야", 즉 전달이 잘 되어 외친 말이 아닌 전달이 잘 될거라는 말을 들은 몇 초 뒤 미래의 지인이 외친 퍽킹루야를 주인공이 잘 전달된 후의 지인 말로 생각해 착각했던 것, 결국 부하들의 약탈과 자신의 죽음은 원래대로 정해져 있던 것이다.

2. 남자가 죽는 미래에 여자가 대신 죽고 남자가 살았다면 미래를 본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남자가 죽는 미래의 모습은 당연히 정해져 있고 그대로 진행된다. 단지 그는 그 과정에서 앞으로 사랑하게 될 여인이 죽는 다는 건 보지 못했다. 미래를 본다는 것 자체가 워낙 모자이크처럼 단편적이라 미래를 볼 때 그건 빠졌다. (그는 양아버지의 미래도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는 그 여자가 자신을 대신해 죽었다고 착각했는데 그건 자기가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대신 죽는 게 아니다. 남자처럼 원래 운명은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의 큰 틀을 보면 남자가 아무리 시간 여행을 해도 여자는 매 번 죽는다. 그녀 역시 정해진 운명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다만 마지막 회생 때 남자의 큰 변수가 작용해 여자에게도 그 변수가 작용한다. 사실 이게 이 영화가 잘 짜여진 각본의 진수이기도 하고 묘미이기도 하다. 결말을 생각보다 잘 풀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3. 단기 미래 능력이지만 실제로는 먼 미래를 봤다

그는 분명 몇 초 뒤나 몇 시간 뒤만 본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 엄마가 죽는 다는 걸 두 달 전에 알았고 양아버지의 집에서 본 노트를 보면 그는 몇 십년 뒤의 미래도 보는 것으로 나온다. 어린 아이 시절 미래를 보고 그렸다는 노트에는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의 모습은 물론 새로 알게 된 여자 주인공의 얼굴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주인공이 어릴 적에 그렸다는 노트에서 그린 여자 그림을 보게 되는데 단번에 자기 자신을 그렸다는 걸 캐치한다) 하지만 이건 오류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단기 미래만 예측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면이 나온 건 사실 그가 예측하는 미래는 모두 "과거"의 회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부제인 "미래를 보는 자"가 사실 단서가 되는데 그 부제를 "과거를 보는 자"로 바꾸어 보면 모든 것의 실마리가 해결이 된다.

관객이 보기에도 주인공이 생각하기에도 그는 분명 미래를 보는 자이지만 사실 그는 미래를 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과거의 장면을 "기억"할 뿐이다.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간 시점에서 그는 당연히 미래 시점(보기에 따라 현재 시점)에서 본 장면을 과거 시점에서 회상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 보면 앞으로 벌어질 미래의 일을 예측한 것이 맞아 미래를 본 것이지만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면 그의 현재는 미래를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미래는 모두 과거의 기억이(경험) 된다. 영화 첫 독백을 잘 보면 그는 인생을 한 번 산 경우처럼 말한다. 데자뷰처럼 말이다. 데자뷰의 경우 우리는 "여기 내가 왔었던 것 같아"라고 말한다. 과거에 왔었는데 잊고 있다가 와서 기억이 살아난 것이 아니라 온 적이 없는데 왔었다는 건 미래 어느 시점에 내가 여길 왔었는데 여기 오니 기억이 난다고 하는 것처럼 실제로 과거형으로 말한다.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그는 온 적이 없는 곳을 온 것이니 미래를 본 것처럼 말이 되지만 실제로는 왔던 곳(경험)이라는 말 자체가 과거를 의미하니 데자뷰 역시 시간 여행 (공간의 왜곡 등) 경험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현상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논리라면 시간 여행을 많이 할수록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더 높아져야 하는데 주인공은 단 3번의 시간 여행과 1번의 정상적인 삶을 산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미래 예지력이 높지 않고 단편으로만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 또한 약물에 의한 치명타로 인해 뇌가 죽어가는 상황이라 더 이상 시간 여행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래서 기억은 더 쪼개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는 시간 여행을 해도 여러 인생으로 나뉘어 살거나 다른 시대에서 완전 다른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 사상에서 말하는 윤회와는 다르다.

4. 여자와 행복해 하는 미래 장면은 실제 영화 전개 과정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 그는 분명 3번의 시간 여행을 한다. 그 때문에 주인공도 모두 3명이 만들어진다. 이 중에서 우리가 처음 카메라의 시선으로 본 1번 주인공은 우리가 본 그대로다. 그는 창고에 갇혀 여자가 죽는 걸 본 뒤 주사기를 맞아 2번 주인공의 시간대로 간다. 술집에서 깨어 난 그는 모텔을 찾고 이후 양아버지 집에 갔다가 팔에 총을 맞고 다시 3번 주인공의 시대로 간다. 처음 여자와 만나는 장면에서 3번 주인공과 싸우다 넘어져 배에 주사기가 꽂히고 3번 주인공의 바로 앞 저녁 미래로 순식간에 넘어가 동일 시간대로 시간 여행을 더 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3번 주인공 시간대라 실제 이동은 4번이지만 3번 시간여행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그는 결국 원래 자신이 본 미래 모습 그대로 총에 맞아 죽게 되는데 총상에 의해 몸 안에 있던 약물이 나오면서 과거 양아버지의 연구실로 돌아가 거기서 죽는다. 1번 주인공이 죽은 것이다.

전개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구도를 보면 1번은 과거 아버지의 연구실에서 사망하고 2번은 풀 숲에 숨어 팔에 총상을 입게 될 것이고 3번은 창고에 양아버지와 갇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때 시간 여행을 통해 각 주인공들을 보면 총상을 입어도 과거의 자신은 총상을 입은 상태가 아닌 걸 알 수 있다. 즉 서로 연동이 되지 않는다, (양아버지가 과거의 자신들과 절대 마주치지 말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 그러니 당연히 주인공도 실제 3명이 움직인다.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건 이들이 운명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2번은 1번처럼 시간 이동을 해 결국 1번과 마찬가지로 연구실에서 죽을 것이고 3번은 2번이 있던 시대로 가고 다시 1번처럼 움직이다 역시 연구실에서 죽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본 3명의 주인공은 결국 다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주인공이 또 남아 있는데 바로 어린 주인공이다. 우리가 직접 사망하는 장면을 본 1번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모두 과거의 양아버지 연구실에서 죽게 되는데 이 때 주인공들이 양아버지에게 남긴 말은 자기 이름과 자기를 입양하라는 말이었다. 즉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죽게 되어 이동하게 된 4번째 과거 시간대인 아버지의 연구실 장면은 그 시간대의 또 다른 4번 주인공이 있기 마련인데 그 때의 4번 주인공은 입양 되기 전, 엄마랑 살던 어린 주인공이 있던 것이다. 영화를 보면 그 아이도 결국 똑같은 과정을 거쳐 시간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그 아이가 커서 여자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물론 1번 주인공의 희생과 2번 주인공의 변수로 인해서 이 어린 꼬마 아이는 1번, 2번, 3번과 다른 삶을 산다. 그래서 여자와 행복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

5. 첫 출발은 어디고 무엇

이 영화의 가장 큰 제약이 바로 시간 여행을 썼다는 점이다. 이것이 잘 풀어도 본전일 수 밖에 없는데 시간 여행을 하게 되면 누가 먼저고 누가 어디서 시작 되었는지를 감 잡기 어렵다. 단적으로 이 영화만 해도 주인공은 3번의 시간 여행을 한 뒤 결국 자기 자신이 어릴 때로 돌아가 죽는다. 그 때는 동시간대 엄마랑 사는 주인공이 따로 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어린 주인공도 엄마의 죽음을 예측한다. 이미 전생을 경험했다는 뜻으로 해석될 소지가 많다. 하지만 어린 아이는 시간 여행을 직접 하지 않고 바로 미래를 보았기 때문에 이 점은 사람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입양을 하는 것 만으로도 아이의 운명이 결정되었거나 양아버지가 입양 후 주사를 아이에게 놓았다고 가정할 수 있는데 아이는 입양 되기 이전 엄마랑 살 때 이미 예지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양아버지와 만나기 전부터 관계 없이 예지력을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모든 이런 영화가 그러하듯 시간 여행을 하게 되면 이런 오류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데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보면 이 영화가 다른 영화와 달리 충분히 이 부분조차 해소할 소지가 하나 있다. 생각과 달리 엄마가 죽기 이전 입양을 결정했거나 (모자세대였다) 입양하기 위해 아이에게 접근 하는 과정에서 약물이 투입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1번 주인공의 의견을 듣고 아이를 수소문해 찾은 양아버지 과학자가 입양 하기 전부터 실험을 시작했다고 볼 소지가 많은 것이다. 실제로 그 시간대 양아버지는 1번 주인공의 피가 자신이 만든 약물로 채워졌다는 사실에 놀랐고 자신의 연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 그 남자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알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 경우는 이 아이를 실험에 쓰기 위해 약물 실험을 먼저 했던 것인데 이후 아이가 크고 영화처럼 삶을 2번 돌고 난 뒤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이 부분마저 논리의 비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른 영화에 비해 충분히 커버 칠 수 있다면 커버 칠 수 있는 요소가 많아 개연성은 상당히 높다.

6. 마지막 결말은 어떻게

이 영화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마지막 마무리 때문이다. 분명 단순하게 보면 영화는 끝이 난 게 아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또 영화처럼 반복하고, 돌고 돌아 계속 삶을 회전 시킨다, 주인공이 영생을 하고 있다고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불지옥에 빠져 평생 고통 받는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나와 같이 영화를 본 사람이 이렇게 평했다) 마무리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마무리가 안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계속 죽고 계속 산다. 계속 고통 받고 계속 버림 받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큰 변수는 2번 주인공이다 (숲에서 팔에 총상을 입었던 때의 주인공) 바로 앞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주인공에게 우리가 간과해서 안되는 건 바로 전 과거다. 1번 주인공의 삶을 그대로 따르게 되는 2번의 과거가 틀어졌다는 걸 눈치 챘다면 이 영화 속 이야기는 진짜 해피엔딩이라는 걸 알게 된다.

1번 주인공은 3번의 삶을 시간 여행 한 후 죽는다. 2번과 3번 역시 똑같은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바뀐 건 없고 계속 도돌이표처럼 인생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바뀐 게 있다. 1번의 인생과 다른 것들 말이다. 영화에서는 3명의 주인공이 모두 동일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면 2번 주인공이 살아 있는 여자 주인공과 만나 조우한다는 걸 알 수 있다. 1번의 희생으로 여자가 살고 2번은 여자가 살았기 때문에 여자를 살리기 위해 시간 여행을 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결국 3번째 시간 여행은 2번 주인공에게는 필요치 않다.

3번까지 시간 여행이 된 상태에서 2번 주인공의 상황을 보면 1번 주인공이 희생을 각오하고 정해진 운명에 도전하면서 원래 없던 변수가 생겼다. 1번 희생 덕분에 여자 주인공은 가슴이 아닌 어깨에 총을 맞아 살게 되고 지인(의뢰자)이 부하들의 수작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부하에게 총 맞아 죽는다. 그 시간대 창고에 있던 3번 주인공은 아버지에 의해 주사를 맞고 시간 여행을 할 것이니 2번은 3번과 만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부하들은 다이아몬드를 갖게 되면서 그대로 도주한다. 주인공 남녀를 찾을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여자도 총 맞아 죽고 남자도 총 맞아 죽는 걸 봤기 때문에 부하 입장에서는 이제 볼 일이 없는 상황. 결국 2번 주인공이 집에 뛰어 들어가도 남아 있는 사람은 창고에 갇힌 양아버지와 어깨에 총 맞고 살아 있는 여자 뿐이다. 2번 주인공 입장에서도 다이아몬드를 되찾을 필요가 없고 (의뢰자가 이미 사망) 자기와 관련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부하들 뿐인데 이미 그들은 다이아를 갖고 도주를 했다. 결국 시간 여행을 할 이유가 없어 그대로 여자와 함께 잘 살면 끝.

결국 우리가 쭉 지켜봤던 1번 주인공 (맨 처음 등장해 결국 죽은 주인공 인물) 희생에 의해 운명이 바뀐다. 주사를 맞고 2번 시대로 온 3번은 (2번처럼 숲에서 총상을 입을 운명) 1번의 희생으로 2번이 시간 여행을 하지 않고 살아 있는 여자와 조우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임으로 다른 지역으로 사라지거나 이제는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자기 자신과 다시는 만날 확률이 적은 다른 시간대로 움직일 확률이 높다. 아님 1번의 희생으로 2번 주인공에게 변화가 생겼음으로 3번이 2번 시간대로 올 이유가 없어 아버지와 함께 살며 그 시대의 그 여자와 만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1번이 죽으면서 양아버지에게 부탁한 꼬마 아이 자기 자신인데, 결국 이 논리가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해결이 되려면 그 아이는 이미 예지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에서 본 장면 그대로 한 번의 생이 돈 뒤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된 이후 모습을 우리가 영화로 다시 또 본 다음 1번의 희생과 2번의 새로운 삶에 의해 아이의 삶도 바뀐다고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아이의 예지력 (실제로는 과거 경험) 스토리가 되려면 성인이 되고 3번 시간 여행을 해야 한다는 논리니 아이는 4번 주인공이 되고 그 4번 주인공이 똑같이 3번의 시간 여행을 하면서 4번이 죽고 5번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전 성인의 모습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1번 주인공은 이미 동일한 삶을 한 번 돌았다는 이론이 성립이 된다. 결국 이야기의 맨 처음과 끝을 다 보았다고 가정할 경우 우리가 맨 처음 본 주인공이 실제로는 4번이고 6번까지 만들어지다 5번이 새로운 환경에 의한 새 운명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6번의 시간 여행이 되는 순간 7번이라 할 수 있는 아이는 이 게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궁극적인 결말은 이런 것이다. 결국 운명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그 운명은 분명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바뀐 운명도 결국 원래 정해진 운명이다. 결국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말도,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말도 틀리지 않다. 크게 보면 바꿀 수 없는 절대 운명이지만 사실 그 운명은 수 많은 변수로 인해 바뀌어져 만들어지는 결과일 뿐이다. 영화가 말한 걸 보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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