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사람도 잘 모르는 인천 최초가 곧 우리나라 최초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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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전통역사

인천 사람도 잘 모르는 인천 최초가 곧 우리나라 최초인 것들

by 깨알석사 202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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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과 함께 들어온 신문물과 문화

인천은 원산, 부산과 함께 열강에(강대국) 의해 강제 개항한 3대 항구 도시 중 하나였지만 서구 문물의 유입 속도는 다른 두 항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른 편에 속했다. 개항 시기만 보면 인천항은 부산항보다 7년 늦게 개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문화기지로서는 더 발전한 측면이 큰데 이는 서울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현재도 서울과 부산은 가장 먼 거리로 대표되는 거리 기준이 되는데 당시로서는 부산이 개항을 했어도 육지를 통해 서울, 경기로 오는 시간과 그에 따른 물류 문제가 컸기 때문에 서울과 가장 가까운 항구인 인천이 서구 문물의 유입지로 최적화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인천은 유독 최초 타이틀을 가진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 인천의 최초가 곧 우리나라 최초로 이어지는 경우도 다반사인데 인천은 개항과 함께 어촌 마을에서 벗어나 외국과 교류하는 국제 항구 역할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외국의 선진 신문물과 문화가 유입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처음 접하게 되는 다양한 문화와 물건들이 인천을 통해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되고 이는 곧 최초 타이틀과 엮어 우리나라 근대 발전의 한 축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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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단순히 국경을 넘어 이주한 경우가 아니라 공식 여권이라는 걸 가지고 합법적으로 이민이라는 형식을 갖고 이주한 이민 제도는 인천에서 시작되었다. 최근 tvN 알쓸별잡 인천 편에서도 이와 관련된 주제와 내용이 나와 그나마 아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인천에서 하와이로 이주한 사탕수수 농장 한인들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나라 이민 역사의 시작점으로 이때 공식적으로 발급한 여권을 갖고 이민을 간 것이 우리나라 이민의 최초(시초) 역사가 된다. 이후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들이 대한민국의 발전과 교육을 위해 대학 설립 자금을 보태게 되는데 하와이 교민들의 돈으로 인천에 대학을 세운다 해서 인천의 "인" 첫 글자와 하와이의 "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 바로 "인하대학"이다.

아래 사진은 당시 인하대 개교를 알리는 기념물인데 지금 인하대생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한 꽤 오래전 모습으로 이 도로가 인하대 정문 앞 도로가 된다. 현재 SK스카이뷰아파트 (수인선 인하대역) 방면에서 인천법원과 인천구치소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기념물 아래 흥방 한글은 흥한방직의 약자로 인하대 조성에 기업 기부금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인하대 개교를 알리는 기념물

하와이 한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이승만 대통령이 주체적으로 설립을 주도했고 서울대와 고려대, 연세대 등 당시 유수 대학의 학자들과 정부 인사를 동원해 인하대 육성 계획을 시도했는데 사립대 중에서 정부와 해외 교민, 국내 명문대학들이 종합적으로 힘을 합쳐 만든 대학은 인하대가 유일하다 할 수 있다. 이후 대한항공으로 유명한 한진그룹에 인수되었는데 인하대 역사를 알게 되면 대학 이름 때문에라도 하와이 교민들의 역사를 알게 되고 하와이 교민들의 역사를 알게 되면 우리나라 최초 이민 역사의 문화도 알게 되기 때문에 인천+최초+이민=인하대 공식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된다. 해외 교민들을 위한 재외동포청이 최근 설립, 창설되었는데 재외동포청이 인천 송도에 위치한 이유도 이민 역사의 최초가 인천이기 때문이다.

해수욕장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해수욕장은 지금까지 1912년에 건설된 부산의 송도해수욕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인천에서의 최초 해수욕장은 1923년에 건설된 월미도 해수탕과 함께 조성된 월미도 해수욕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인천의 해수욕장보다 부산의 해수욕장이 11년 정도 빨랐다. 그러나 인천 지역에서 일본인에 의해 묘도해수욕장과 유곽이 두 곳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사료가 발견되면서 최초의 해수욕장 타이틀도 인천이 갖게 되었다. 지금 위치로 보면 동인천역 뒤 만석동 끝자락 인천북항 자리가 묘도해수욕장이다. 발견 시점이 상당히 늦어 아직도 부산 송도해수욕장이 우리나라 최초 해수욕장으로 아는 분이 상당히 많다.

좌측 일장기가 꽂힌 망루 같은 곳은 다이빙대

묘도해수욕장은 부산 송도해수욕장보다 6년 빠른 1906년에 건설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1900년대 초에 발행된  당시 신문 보도 자료도 함께 발굴되면서 부산 송도해수욕장이 개장하기 전부터 묘도해수욕장이 운영되고 있었음이 확인되어 해수욕장 최초 타이틀은 인천이 확실해졌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 송도유원지와 함께 묘도유원지도 유지되었으나 구한말부터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간척 사업이 쭉 진행되었고 대한민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묘도해수욕장이 위치한 만석동 주변은 매립을 통해 인천항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1970년대 이후에는 송도유원지만 유지되고 이후 묘도유원지는 명맥을 잊고 기억 속에 사라져 3대를 이루는 인천토박이나 1970년대 이전 만석동 주변에 거주한 사람이 아니면 묘도유원지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1990년대 이후 인천에 거주했다면 존재감은 제로.

일제시대 찍힌 위 묘도해수욕장 사진에서 묘도해수욕장 건너편 보이는 섬 역시 지금은 사라진 "율도"인데 인천 서구권으로 버스 통학을 하거나 통근을 해 본 사람들은 한 번은 꼭 들어봤음직한 그 "율도"가 바로 저 섬이다. (서구행 버스의 종점이 대부분 율도라서 버스에 율도가 꼭 적혀있었다) 동인천이든 주안이든 부평이든 서구행 버스는 율도가 종점이라 동인천-율도 이런 식으로 버스 종점이 적혀 있어 율도 인지도는 높지만 마찬가지로 매립되어 사라진 섬이라 실제 율도 위치를 아는 사람은 서구 주민도 거의 모르는 편이다. 석남동 거북시장과 가정동 중앙시장(신현시장) 중간이 율도인데 (역으로 가정중앙시장과 거북시장이 과거에는 해변이었다는 뜻) 지금은 바로 위에 청라국제도시가 들어섰고 주변에 가정동 루원시티도 활발하게 건설된 상태라 이곳이 율도라는 섬이었다는 걸 인지하기는 더 어렵다. 다만 지금도 석남동 주변 도심 안쪽 은행 등은 여전히 점포명으로 율도지점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동네 사람은 율도라는 섬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참고로 청라국제도시도 청라도라는 섬이 있어 유래한 도시명이다. 마찬가지로 매립하여 현재는 청라국제도시 일부분이 된 상태인데 인천의 간척 매립지 사업 역사를 보게 되면 얼마나 많은 해안을 매립했는지 기겁할 정도로 당시 바닷가, 해안은 모두 육지 한복판이 된 상태다. 그래서 인천의 해안은 놀랍게도 대부분 누가 봐도 인위적인 직각이다.

묘도라는 섬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고양이 섬으로 알려진 묘도는 현재 만석주공아파트, 만석비치타운 자리로 섬 자체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묘도 이름은 다른 지명으로 남아 지금도 쓰이고 있는데 아동 추천 도서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유명한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그 괭이부리가 바로 묘도를 풀어쓴 말로 이 묘도가 있던 곳이 바로 괭이부리말 주변이 된다. 인천의 역사가 늘 그러하듯 실향민들이 바닷가 주변에 많이 거주했는데 이때 고양이를 뜻하는 괭이라는 말이 이 동네에 사용되게 되면서 붙은 지명이 바로 괭이부리마을(괭이부리말)이다. 아래 지도를 보면 만석비치타운 아파트 바로 우측에 괭이부리마을이 있는 걸 알 수 있다. 최근에는 도시재생사업을 하면서 차이나타운의 동화마을처럼 동네 주거 환경이 상당히 개선된 상태.

참고로 묘도해수욕장과 함께 유곽이 같이 운영되었다고 설명했는데 지금은 잘 쓰이지 않아 모르는 분도 많지만 유곽은 성매매를 하던 집창촌을 의미한다. 일본에 의해 인천 개항지가 주도적으로 운영된 것도 있고 외국인 출입이 잦은 국제항구 도시가 늘 그러하듯 이런 유곽지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던 시대상도 있었는데 일본인이 운영하던 유원지, 유흥지는 이런 유곽이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편으로 당시 공창 개념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인천에는 이런 유곽 영향을 받은 유흥 문화가 꽤 있다. 동인천 개항로 주변, 배다리, 경동사거리에서 신포문화거리, 답동성당 주변에 조선의 기생과 일본 유곽들의 삶과 문화가 서린 터가 있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공원

서양식 근대 공원 역시 인천이 최초다. 인천 사람이면 다 아는 자유공원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1888년 만들어졌다. 서울 탑골공원보다 9년 앞서 만들어졌고 당시에는 각국공원, 만국공원으로 불렸는데 1970년대 이후 맥아더 동상이 들어서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쭉 자유공원으로 불린다. 인천차이나타운 바로 위에 있어 차이나타운을 방문하는 외지인들도 거의 빠지지 않고 가는 곳이라 인지도는 높은 편.

철도

학교에서 모두 배우기 때문에 잘 알려진 편으로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 최초로 건설되면서 철도가 운영된 곳이 바로 인천이다. 우리나라 최초 철도 자체가 인천항과 서울을 잇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기공지탑도 있는데 현재는 도원역 아래 있고 인천역 광장 앞에도 인천 철도와 관련한 최초 역사 안내판도 만날 수 있다. 지금도 인천역 뒤쪽은 인천항 바다다.

염전

천일염은 일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 우리나라는 화염이라는 방식으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이후 일본식 염전인 천일염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도 천일염 생산을 위한 시범 기지를 만들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주안염전으로 1907년 고종에 의해 처음 인천 주안에 들어서게 된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인천 도심 한복판인 주안에 염전이 들어선 걸 의아해하는 분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주안이 모두 바다였고 (주안역 뒤가 바다) 바닷물이 들어찼던 곳이라 주안역 앞 쪽을 포함 이 주변은 그 때문에 예전부터 침수지대로 악명이 높던 곳이다. 앞서 인천의 간척 매립이 얼마나 미친 수준으로 이루어졌는지 짤막하게 설명했었는데 그 하나의 예가 바로 이 주안 매립이다. 즉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경인철도) 주변을 뺀 위아래가 다 바다였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수봉공원에서도 해안을 바라볼 수 있었다.

현재는 표지판이 있어 그 터는 알 수 있는데 도로가이고 인적이 드문 곳에 있어 정확히 알고 가지 않는 이상 찾기는 어려운 편이다. 다만 석바위고가에서 십정동(부평방향) 방향에 있는 간석홈플러스 바로 맞은편 공장 지역이 주안염전자리라 대충 가늠할 수 있다. 홈플러스 바로 옆에 있는 간석자동차매매단지와 나란히 등을 지고 바라보면 주안공단 공장들이 보이고 모두 매우 평평한 평지라는 걸 알 수 있는데 (홈플러스와 매매단지도 평지) 여기가 바로 염전터로 매립을 해서 만든 땅이라 인천 도심에서 의외로 만나기 힘든 평평한 땅 모양을 볼 수 있다. 간석홈플러스에서 부평구 십정동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열우물공원 끝자락 주변에 삼성스토어와 LG베스트샵을 보게 되는데 그 중간 좌측으로 빠지는 도로 근처에 기념비가 있다. 간석홈플러스 옥상 주차장에서 주안공단을 바라보면 그게 다 주안염전이었고 그게 다 과거 바다였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염전하면 목포, 신안을 먼저 연상하지만 설명대로 염전의 최초 발생지는 인천으로 과거부터 주안에 염전이 있어 유명했기 때문에 인천 사람을 보고 인천 짠돌이라 부른 유래가 된다. (소래에도 염전이 있다) 행동을 짜게 굴어서 짠돌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특히 당구에서 워낙 짜게 굴고 (서울은 당구 시작이 30인데 인천은 시작이 80이고 쿠션빡이 존재한다. 상당히 강하게 키운다) 인천 다마가 워낙 특이한 방식으로 당구를 치기 때문에 인천 짠돌이, 인천 짠다마, 인천 짠물은 염전이 있던 지역의 사람이 당구(다마)를 워낙 짜게 쳐서 (야박하게 쳐서) 생긴 말이다. 여기서 지금의 방탄소년단 BTS를 만든 히트곡 "쩔어" 역시 인천에서 주로 통하던 "쩐다"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배추를 절이듯 상대를 쩔임) 소금과 연관되어 만들어진 인천의 몇 안 되는 인천 말 중 하나로 서울과 부천, 인천은 워낙 가깝게 붙어 있어 서울까지 쉽게 전파된 케이스다.

담배

국내 최초의 담배공장인 동양연초회사가 인천에 있었다. 제물포연초회사 역시 인천에 위치했다.

성냥

담배가 나왔으니 성냥도 빠질 수 없다. 1886년 최초의 서양식 성냥공장이 인천에 세워졌다. 성냥팔이 소녀의 동화가 예사롭지 않을 듯 싶다.

등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 역시 인천의 팔미도에 만들어졌다. 1903년 건설된 팔미도 등대는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 이야기에서 절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등대로 이 등대 신호에 의해 맥아더 장군의 상륙작전 개시 결정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 당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북파공작원과 한국전쟁 당시 공작부대 역사를 볼 때도 꼭 나오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등대로 팔미도 등대로 인해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봐도 될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과거에는 민간인이 절대 갈 수 없어 인천 사람에게도 상상 속의 등대로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관광이 가능하다.

성공회 교회

내동에 위치한 내동 성공회 교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교회다. 1891년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영사관으로 2년 정도 운영되었던 과거도 있다. 지금도 성당으로 운영 중이며 닭강장으로 유명한 신포시장에 갈 일이 있을 때 구경 삼아 찾아가는 것도 괜찮다. 공식 명칭은 대한성공회내동교회로 처음에는 성당으로 불렀으나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무너졌고 현재 모습은 한국전쟁 이후 교인들이 다시 세운 것으로 성당이 아닌 교회로 부른다. 다만 과거 성당으로 부른 적도 많아 내동성당으로 통하기도 한다.

감리교 교회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감리회 교회로 1885년 지어졌다. 앞서 설명했던 내동성공회교회보다 6년 빠르다. 지금도 운영 중이다. 내동 성공회 성당과 이웃 거리에 있다. 동인천역에서 신포동(신포시장) 가는 대로변에서도 골목 쪽을 보면 보인다. 후술 하겠지만 야구선수 류현진의 모교이기도 한 영화학당(영화학교)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는 그 역사성만큼 인천의 내리교회를 어머니교회로 부른다고 한다.

참고로 인천에서는 답동성당(천주교)도 꽤 유명한데 인천시민 입장에서는 답동성당도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인천 지역 최초이지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은 아니다. 물론 답동성당 역시 1889년 본당이 설립되어 무려 134년이라는 역사를 갖고 있지만 우리나라 최초는 서울의 약현성당으로 1893년에 지어졌다. (어? 계산이 안 맞는데요, 답동성당이 더 빨라요~) 답동성당의 경우 (초창기 제물포성당) 답동성당을 짓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 최종 완공된 건 1897년으로 제물포성당(답동성당) 본당이 설립되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8년 뒤 성당 건물이 완공되었기에 실질적으로는 약현성당보다 4년이 늦다. (4년 차이로 최초 타이틀을 놓쳤다) 참고로 전 국민이 다 아는 서울의 명동성당은 약현성당보다 5년 뒤인 1898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니까 약현성당이 완공되고 난 다음 4년 뒤 인천 답동성당이 완공되었고 그다음 1년 뒤 명동성당이 완공된 것. 비천주교인 입장에서는 답동성당이 명동성당보다 짬밥(?)이 더 많다는 걸 모르는 인천 사람도 많다.

외국인 사교 클럽

자유공원 바로 아랫길에 위치한 제물포 구락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사교 클럽으로 클럽을 일본 사람이 구락부로 부른 것에 연유하여 제물포구락부로 불렸다. 알쓸별잡에서 인천 편 담소 장소로 등장했던 인천시장 관사로도 활용되었던 인천시민애집이 바로 앞에 있다.

기상관측소

인천기상대가 우리나라 최초 기상 관측소다. 총독부 이전 통감부 시절인 1904년에 만들어져 관측소로 운영되었다. 당시에는 일기예보를 위한 기상대 역할뿐 아니라 천문 관측을 위한 망원경을 설치하여 천문대 역할도 했었다.

초등교육기관

우리나라 초등교육기관 중 최초로 운영된 곳이 영화학당이다. 1892년 영화여학당, 1893 영화남학당이 만들어졌고 이후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 영화초등학교로 운영 유지되고 있다. 인천에는 창영초등학교와 함께 영화초등학교를 100년이 넘은 최고(오래된 역사) 초등학교로 알고 있는데 그 영화초등학교가 바로 영화학당의 후신이다. 영화학당은 앞서 설명한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의 존스 목사와 그의 부인 벵겔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되었는데 존스 목사는 배재학당 교사 출신이고 벵겔은 이화학당 교사 출신으로 인천 내리교회에 파견을 와서 영화학당을 만들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헷갈려하는 것이 영화학당이 최초라고 하면서 영화학당을 만든 존스 목사와 벵겔 부인이 각각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서 온 점을 들어 영화학당이 두 학당보다 늦게 만들어졌다는데 어떻게 최초인가 하는 의문점을 갖게 된다. 배재학당만 해도 영화학당보다 7년 빠른 1885년 최초로 만들어진 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어린이 전용 학교인가 아닌가로 구분하여 최초 타이틀을 나누게 된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어린이뿐 아니라 청소년도 대상이었고 사실상 중등과, 고등과(대학부) 과정이 메인이었다. 실제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은 중등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고 중등교육기관으로 최초 타이틀을 갖는다. 그래서 두 학당의 후신 역시 배재고, 이화여고, 배재대학, 이화여대로 초등교육기관과 거리가 있다.

반면 영화학당은 후신이 영화초등학교로 쭉 초등교육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후 영화학당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만들어 운영하게 되지만 영화초등학교는 계속 유지하였고 지금도 운영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등교육기관에서는 영화학당이 두 학당보다 앞선다고 보고 최초 타이틀을 갖는다. 무엇보다 초등교육에 맞춰 학교 체계를 어떻게 구성했는가도 중요한 점이 되는데 다른 두 학당은 초등교육과 무관한 그 이상의 교육을 한 반면 (영어교육 등) 영화학당은 현재의 초등교육 수준으로 어린이학교를 운영했기 때문에 여러 관점에서 달리 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

정리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은 인천의 영화학당인 것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은 배재학당,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중등교육기관은 이화학당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초등교육기관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영화학당 역시 여자 어린이를 위한 교육시설이었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더 어렵던 여자 어린이에게까지 전문 교육을 실시하였다는 점에서 이화학당보다 우선시 되기도 한다. 영화학당 여학생이 진학 코스로 이화학당에 주로 갔다는 것도 초등교육만큼은 영화학당이 먼저라는 걸 반증한다.

인천광역시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영화학당 본관 사진인데 앞의 모닝차와 대조되면서 많은 걸 느끼게 해준다. 건물은 영화초등학교 안에 있다.

영화학당은 최초의 어린이 교육기관이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최초라는 역사를 낳기도 했다. 이들이 성장하면서 만들어가는 역사들이 곧 최초인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여성박사, 최초의 음악교육가, 최초의 체육기자 등 최초 타이틀을 단 사람들의 역사 페이지 안쪽에 영화학당이 있었던 것. 무엇보다 이화학당과 이화여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러나 논란의 중심이 되는) 김활란 역시 영화학당 출신으로 이 학생이 커서 나중에 이화학당, 이화여대를 이끄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에서라도 근대 교육의 중심에 영화학당을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참고로 인천 사람 중 과거 영화여중과 (1986년 폐교) 영화여상으로 불리다 지금은 교명을 바꾼 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도 영화학당과 연관성이 있나 궁금할 텐데 두 학교 모두 영화학당이 만든 학교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맞다. 즉 인천에서 "영화"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학교들은 모두 영화학당에 뿌리를 둔 한 식구다. (영화여상과 영화초 밖에 없지만...)

해군사관학교

인천 강화도(당시 강화부)에 위치했던 통제영학당은 조선수사해방학당으로 불렸던 곳인데 1893년 창설되어 장교(사관생도)와 수병을 동시에 육성하던 사관학교였다. 조선수사해방학당의 해방은 독립 해방이 아닌 해상방어의 뜻을 가진다. 특이하게 사관생도와 수병을 동시에 훈련시켰는데 당시 조선 입장에서는 사관생도와 수병을 분리해 따로 육성한다는 게 쉽지 않아 해군 병력을 종합해 키우는 것으로 해당 훈련부대를 만들었었다. 그러나 학당이 만들어지고 몇 달 뒤 청일전쟁이 터졌고 이듬해 곧바로 해체를 당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해군에서는 흑역사 취급을 한다. 고로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으로 보지 않고 해군의 시초로 보지도 않는다. 다만 역사 관점에서 근대화된 선진 국방 기술과 훈련 방식을 도입해 외국인 교관이 직접 우리나라 해군 장병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형태와 구조가 해군사관학교와 같았다는 점에서 조선수사해방학당을 해군사관학교의 초기 모델이라 친다면 인천에 위치했기 때문에 군사학적 관점이 아닌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인천이 해군사관학교가 있던 최초의 지역으로 본다.

세관

인천세관은 1883년 설립되어 우리나라 최초로 운영되었다. 인천항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던 만큼 관세 업무도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청국과 왜국(일본)이 주둔했던 만큼 인천세관의 역사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르다. 처음에는 관세 개념이 없어 세금을 걷지 않다가 원산과 부산, 그리고 인천이 개항하고 해외 물자와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관세 개념에 눈을 떠 해관을 설치해 관세(세관)를 운영하게 되었다. 인천세관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멸실되어 사라지고 창고만 남은 상태인데 이마저도 철거할 예정이었으나 뜻있는 사람들이 철거를 반대하여 현재는 공원화로 유지되고 있다. 인천 사람은 짜장면을 먹으로 차이나타운에 가지 않고 신성루로 간다는 말도 가끔 있는데 인천세관 창고가 바로 이 신성루 아래쪽에 위치한다. 인천여상에서 항동 쪽 건너편에 위치.

극장

닭강정으로 유명한 신포시장 맞은편에 있는 애관극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냥 동인천에 오래전부터 있어서 유명한가 싶은 인천시민도 꽤 많은데 우리나라 최초인 만큼 역사가 꽤 되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많아 유명해진 극장이다. 현재도 운영 중이며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 애관극장 주변 답동성당과 그 아래 1889년 7월 1일 (134주년)

고속도로

경인철도와 함께 고속도로 역시 인천과 서울을 잇는 경인고속도로가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다. 간혹 경부고속도로가 최초로 아는 분도 있는데 철도든 자동차든 경부선보다 경인선이 무조건 다 앞선다. 철도도 경부선보다 경인선이 먼저 완공되었고 고속도로도 경부선보다 경인선이 먼저 만들어졌다. 그 역사만큼, 또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교통량도 넘사벽이라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뽕을 뽑은 (본전을 뽑은) 고속도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무료화 주장 운동이 나온다.

민자고속도로

의외로 민자고속도로 부문 역시 인천이 최초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이면 거의 대부분 이용하는 인천공항고속도로다. 요금이 사악하기로 유명한데 민자고속도로라 그렇다. 해외 투자자는 물론 국내 건설사와 금융기관(보험사) 등도 출자를 많이 했고 또 의외로 재미를 봤기 때문에 이후 민자 건설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인천역 (전철 종착역)

논란이 약간 있지만 기차라는 것이 분명 철길을 달리고 그 철길의 역사는 경인철도(경인선)에서 시작한 건 분명한 사실이라 경인선에 위치한 기차역 중 하나가 가장 오래된 최초의 기차역이 되어야 하나 실제로는 전라선에 위치한 춘포역이 우리나라 최초의 기차역으로 등재된 상태다. 이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들의 역들이 초창기에는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벽체 없이 기둥과 지붕으로만 이루어진 간이역 형태로 운영되었기 때문인데 제대로 된 역사(역건물)를 갖춘 건 전라도의 춘포역이기 때문에 최초 기차역 타이틀은 인천역이 갖고 있지는 않다. 이건 당시 노량진역도 마찬가지. 역 건물도 없이 플랫폼만 덩그러니 있고 벽체 없이 기둥에 지붕만 씌운 간이역들이 폐역 중에 많은데 경인선 초기 역들이 바로 이런 형태였기 때문에 이름만 역이었지 실제 건물은 없었기 때문에 최초 기차역은 경인선과 무관하다.

다만 종착지로서의 최초 타이틀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인천역은 경인선의 종착지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종착역이라는 부분에서는 최초 타이틀을 가진다. 종착역으로 만들어진 역 중에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먼저 최초로 만들어진 역인데 인천역은 그 뒤로 철길을 더 이을 수 없는 구조적 한계 때문에 종착지 타이틀은 계속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뒤가 바다이고 수인선을 이어도 어차피 여기가 수인선의 또 다른 종착지다)

시립박물관

우리나라에서 공립 박물관 중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천시립박물관이다. 1946년에 만들어졌다.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은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최근 방송매체에 많이 나오는 장사의 신 은현장이 키운 인천 꼬막식당이 바로 이 근방에 있다. 아래 지도에서 인천시립박물관 위 축현초등학교가 보일 텐데 정문에 꼬막식당이 바로 그 식당이다.

보육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아동보육기관이 만들어진 건 인천의 해성보육원이다.

우편

인천에서 빠질 수 없는 최초 타이틀은 바로 우편업무다. 인천의 우편 업무 시작이 곧 우리나라 우편 업무의 시작으로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해에 우편 업무를 시작했다. 현재도 인천중동우체국이 그 역사를 이어 운영 중이지만 건물은 인하대병원 쪽으로 옮겨 운영 중이다. 원래 자리의 우체국 건물은 1923년에 지어져 과거 일제시대 건물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딱 봐도 한국은행 같은 느낌을 주는데 신포시장 남쪽 아래, 중화루 아래 있는 신포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면서 대로 맞은편을 보면 웅장한 당시 인천우체국을 볼 수 있다.

전화

경인선과 마찬가지로 통신 역시 인천과 서울을 잇는 통신선이 우리나라 최초로 인천과 한성을 잊는 시외전화가 그 주인공이다. 전화 첫 개통지는 인천으로 1898년 전화가 개통되었다. 보통은 시내전화가 먼저 개통되고 이후 시외를 벗어난 시외전화가 나중에 생기는 것으로 알기 쉽지만 첫 전화는 서울과 인천을 이어주는 시외전화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시내전화보다 시외전화 역사가 더 빠르다.

호텔

우리나라에 근대화된 서양식 호텔로 최초 설립된 건 대불호텔이다. 인천차이나타운 주변에 있어 지금도 구경할 수 있는데 당시 건물은 철거되고 이후 다시 복원화를 거쳐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 대불호텔은 당시 건물은 아니다. 당시에는 외국인이 인천항으로 들어오면 서울로 바로 갈 수 없어 호텔 숙박이 필수였는데 이후 경인철도가 완성되면서 곧바로 서울로 떠날 수 있게 되자 숙박의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어 호텔 영업이 어려워지면서 망하게 된다. 이후 대불호텔은 중국 요릿집이 되고 (중화루) 중화요릿집도 폐업을 하게 되면서 결국 사라진다. 일본 조계지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여의사가 세운 의료법인

우리나라에서 병원, 의료법인 최초 타이틀은 인천에 없지만 여의사가 세운 의료법인으로 범위를 달리하면 최초 타이틀이 있다. 바로 이길여 여사가 세운 길병원이다. 단순 병원 개업으로 따진다면 다른 분이 최초 타이틀을 가지겠지만 그 병원을 키워 종합병원으로 그리고 다시 대학병원으로(가천대) 만든 건 이길여와 길병원이 최초다. 인천에는 인하대병원도 있지만 가천길병원이 그에 못지않게 대적하는 적수가 된다. 대학만 보면 인하대가 가천대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반면 병원만 보면 길병원을 더 높게 치는 분도 있다. 인천을 대표하는 병원이면서 인천권역광역응급실을 지정, 운영하는 것도 길병원이다. 백병원 차병원처럼 설립자의 이름이 들어간 병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서울에도 길병원을 건립 준비 중이다.

은행지점

우리은행 인천지점은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점포로 1899년 개점한 역사를 갖고 있다. 대한천일은행으로 시작한 우리은행 인천지점은 우리나라 은행 중 가장 먼저 설치된 은행인데 당시 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이 바로 영친왕이다. 그래서 금융기관 최초 타이틀도 갖고 있고 있는데 1909년 개설한 우리은행의 본점 격인 우리은행 종로지점보다 역사가 빠르다. 이 때문에 우리은행장은 대대로 영친왕에게 인사를 드리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현재도 동인천역 바로 길 건너편에서 운영 중으로 건물은 다르지만 우리나라 최초 은행 점포라는(지점) 역사성을 갖고 운영하고 있다.

해수탕

바닷물을 끓여 목욕을 할 수 있는 해수탕의 역사 역시 인천이 최초다. 월미도 해수탕(조탕)이 그 주인공으로 월미도가 유원지화되기 이전부터 원래 월미도는 해수탕으로 유명했다. 이후 해수탕이 사라졌지만 월미도 바다 바로 맞은편 영종도에 해수탕이 생기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다 인천국제공항 개발 붐과 함께 철거가 되면서 현재 인천의 해수탕 문화는 끊긴 상태다.

사립초교

영화학당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 현재의 영화초등학교는 1892년 우리나라 최초 초등교육기관 타이틀을 가진 학교로 사립 초등학교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최초 개교 초등학교가 된다. 물론 공립학교보다 빨리 개교했기 때문에 사립, 공립 통합해도 최초다. 인천 최초, 우리나라 최초 감리교 교회인 내리교회에서 시작되었기에 감리교 교회 부문, 영화학당 부문 (내리교회에서 운영), 영화초등학교 부문 (영화학당에서 출발) 모두 내리교회 최초 타이틀과 인연이 깊다.

공립초교

인천창영초등학교는 공립 초등학교 중 가장 오래된 학교로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개교한 공립초교다. 그래서 보통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 명칭을 모두 사용했다. 인천에서 창영초와 영화초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둘이 붙어 있어 통합해도 되지 않나 싶겠지만 영화초는 사립이고 창영초는 공립이라 통합은 현재로서 불가. 물론 두 학교 졸업생이 모두 반대할 건 자명하다. 초등학교지만 최초 타이틀을 갖고 있는 만큼 120년 넘게 배출한 학생들이 많아 은근 졸업생들 부심이 강하다.

목사

인천내리교회의 또 다른 최초 타이틀 중 하나가 바로 목사. 내리교회의 김기범 목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인 목사로 알려져 있다.

해발 높이 기준점

방송에도 간혹 등장하는데 우리나라 수준원점은 인천 앞바다를 기준으로 한다. 쉽게 말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해발 몇 미터의 그 해발 기준이 바로 수준원점인데 그 최초 원점이 인천에 있다. 수준원점은 현재 인하대 교정 안에 있고 이를 근거로 해발 높이를 측정한다. 아래 지도가 정확한 수준원점으로 인하대가 아닌 수준원점으로 지도 검색해도 나온다.

정미소

인천은 국제항으로 곡물 시장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쌀과 관련해 역시 인천에 정미소가 최초로 만들어졌다. 지금의 주식처럼 당시에는 곡물로 투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등장하는 것도 모두 인천 지역이다. 인천정미소는 1889년부터 일찍 운영되었는데 일제의 쌀 수탈 과정과 맞물려 일본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만들어졌다.

한국인이 운영한 정미소

정미소가 처음 들어선 곳도 인천이지만 조선인이 처음 최초로 정미소를 만든 곳도 인천이다. 조선인 최초로 세운 유군성정미소가 그 주인공으로 1924년에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현재 정미소 자리들은 모두 수인곡물시장 대각 건너편, 동인천 이마트와 그 옆의 블록 전부, 삼익아파트 맞은편, 인천여상의 우측 지역 전부가 대부분의 정미소 자리라고 보면 된다.

백미 도정

과거 어르신들은 이밥(흰쌀밥)에 고깃국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했었다. 그만큼 흰쌀밥은 귀한 대접을 받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백미 도정을 한 정미소는 타운센드정미소로 인천에서 최초로 도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운센드 정미소 자리는 현재 중구청 주변에 있는 크라운 볼링장으로 인천에서 볼링 좀 친다는 사람이면 잘 아는 볼링장 중 하나다. 참고로 타운센드 정미소는 증기기관을 활용한 근대 시설 정미소로의 최초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야구와 축구의 도입

야구와 축구 모두 인천에서 국내 최초로 도입되었다.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1904년 알려진 것으로 기록되었고 그보다 더 빠른 기록이 비공식적으로 존재하나 이 역시 인천에 있는 일본인 학생이 한 것으로 나와 인천이 최초인 건 변함이 없다. 참고로 축구가 야구보다 더 빨리 들어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천을 연고로 한 프로 야구단과 프로 축구단이 큰 활약을 보이진 못하고 있다.

곡물시장 (수인곡물시장)

지난번 인천의 재래시장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연 곡물시장으로 현재도 운영 중이다. 수인선의 역사, 인천항의 역사, 일제강점기 쌀과 곡물의 수탈 역사와 반드시 연관되어 있어 항상 등장하는데 의외로 인천 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시장이 현재는 많이 축소되었지만 기름집이 여전히 운영되고 있어 참기름, 들기름 직접 짤 때는 그래도 많이 찾는다. 조선과 일제강점기, 근대화 문화와 관련해 철도덕, 역사덕들에게는 그나마 많이 알려져 있다. 대각으로 길 건너편이 최초 정미소들이 있던 장소다. 우리나라 최초의 곡물시장인 수인곡물시장에 대한 정보는 지도 아래 재래시장 포스팅을 참고.

[산업/농수축산] - 인천의 재래시장, 전통시장을 모두 알려줌 (인천 시장 현황과 특징)

여공파업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여성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파업한 곳이 인천이다. 인천의 정미소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었는데 파업 역시 정미소에서 발생했다. 사건의 주범은 카토오 정미소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인이 운영하던 정미소였다. 수 백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에 합동 파업을 하였고 대규모 시위를 했다.

인천항 이중갑문(독)

인천항의 이중갑문은 우리나라 최초, 인천 최초와 동시에 동양 최초 타이틀도 갖고 있다. 지역을 넘어 국가를 넘어 아시아에서는 보기 힘든 이중갑문 형태로 인천항이 개발되고 성장하는데 큰 몫을 차지했다.

UN기구 사무소

우리나라에 본부를 두고 있는 UN기구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나라 최초로 UN기구인 녹색기후기금이 인천에 위치하고 있다. UN 활동과 취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인천에 있는 녹색기후기금도 참고할 만하다. 위치는 송도국제도시.

그 외 먹거리들

투다리​

꼬치와 맥주를 파는 프랜차이즈로 잘 알려진 투다리는 인천에서 시작한 점포다. 그래서 인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반대로 다른 지역 사람은 인천에 투다리가 유독 많은 걸 신기해한다.

김밥천국​

김밥천국 역시 인천에서 시작한 프랜차이즈다. 간석시장 맞은편에서 서점을 하다 김밥집을 차렸는데 이후 싼 김밥이 대박이 나면서 서점을 하던 주위 동료들에게 업종 전환을 권유하게 되어 말 그대로 김밥천국 시대를 열었다. 나중에는 서울로 옮겨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화한다. 이와 관련한 포스팅이 있으니 참고

[식탐/맛집탐구] - [추적59분] 국민 브랜드 김밥천국, 원조 김밥천국 가게는 어디에?

짜장면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짜장면의 발상지는 인천이다. 최초로 짜장면이 만들어지고 탄생한 건 많이 아는 상식. 그러나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짜장면의 원조라 알려진 공화춘과 그 후손이 운영한다는 신승반점만 갖고 공화춘의 역사, 짜장면의 역사를 따지는 경우가 많지만 공화춘의 역사를 일부 공유하는 가게가 또 있다. 1918년 창업한 중화루이다. (인천우체국 설명과 대불호텔 설명할 때도 잠깐 등장했었다)

1980년대 경영난으로 화교가 운영하던 오리지널 공화춘이 폐업하고 공화춘의 역사는 끝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후 현재까지 공화춘은 한국인이 상호만 동일하게 하여 운영) 공화춘의 외손녀가 신승반점을 운영하면서 실질적인 공화춘의 계보는 신승반점에 있다고 논쟁이 붙은 건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공화춘 폐업 이후 공화춘 사장이었던 우심진이 동업 관계를 맺어 중화루를 매입했던 적이 있었다. 그 중화루는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었던 대불호텔이 망한 뒤 들어 선 가게이기도 하다. (대불호텔이 곧 중화루다) 그러다 태화원의 사장으로 잘 알려진 화상 손덕준 가족에게 중화루 식당이 넘어가는데 손덕준의 외할아버지는 공화춘 사장이 인수해 운영했다는 중화루의 지배인 출신, 손덕준의 아버지는 공화춘 주방장 출신이다.

정리해 보면 현재 공화춘은 상호만 같고 전혀 다른 가게라는 것이 되고 신승반점은 공화춘의 외손녀로 혈연관계일 뿐 주방까지 계승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당시 공화춘의 사위도 같은 화상, 화교라서 물론 공유되는 레시피가 있겠지만) 지금의 중화루는 (태화원의 손덕준 가족이 인수한 중화루) 공화춘의 직계 사장이 폐업 후 인수한 가게였으며 (과거 중화루의 사장이 공화춘 사장인 것) 그 중화루를 인수한 태화원의 손덕준 사장 가족 내력에 공화춘 지배인과 주방장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이어나간 이력이 있기 때문에 공화춘 식당과 공화춘 사장과도 연결되기 부분이 여러 존재한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 중화루가 공화춘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태화원은 공화춘 주방장의 아들인 손덕준의 가게지만 중화루는 공화춘의 사장이 인수해 운영했던 가게이기도 해서 태화원(형)과 중화루(동생)의 차이는 크지 않지만 상징성을 놓고 보면 중화루는 공화춘 사장 인수 운영이 플러스되기 때문에 의미가 더 있다.

공화춘은 가게 이름을 승계했고 신승반점은 공화춘의 혈육이 운영한다는 점에서 승계했다고 보는데 중화루는 공화춘의 주방을 승계한 셈이라 실질적인 맛의 승계로 보면 중화루가 가장 승계에 가깝다는 논리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공화춘과 과거의 중화루, 현재의 중화루 역시 모두 연결되기 때문에 공화춘의 오리지널 맛은 태화원이나 중화루에 가야 맛볼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사위와 그 외손녀가 직접 운영하는 신승반점이 그래도 가장 공화춘의 맛을 찾는데 유리하다 보기는 하나 태화원과 중화루 사장의 아버지가 공화춘의 주방장이었다는 점에서는 세 가게 모두 시식해 보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솔직히 다 맛있다. 아니 짜장면은 다 맛있다)

애초에 손덕준이라는 인물 자체가 화교계의 거물이고 방송에도 이연복, 여경래 셰프만큼 인지도를 갖고 있는 중식계의 대부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중식 3대 문파에 나오는 인물이며 태화원, 중화루 말고도 자금성 역시 그의 가족 식당이다. 그런 점에서 중화루든 태화원이든 자금성이든 신승반점이든 공화춘과 상관없이 한 번은 방문해 볼 가치가 있다.

참고로 중화루는 차이나타운에서 약간 벗어나 신포닭강정과 가까운 신포공영주차장 바로 뒤에 혼자 있는데 가게 규모가 상당히 크다. 식당보다는 기업 빌딩에 가까운 모습. 1918년 영업한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으로 썼던 건물로 알려져 있다. 

짬뽕

짜장면이 최초로 인천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짬뽕 역시 인천에서 파생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짜장면이 중국에 뿌리를 둔 것처럼 짬뽕 자체도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나 짜장면처럼 짬뽕 역시 일본에는 없는 한국만의 고유한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짬뽕 역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그 유래가 짜장면보다는 깊지 않지만 짜장면이 유명해지면서 중국집이 성행했기 때문에 중국 본토에 없는 짜장과 짬뽕 둘 모두 차이나타운에서 그 유래를 찾는데 짜장면과 달리 짬뽕의 원조집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차이나타운에서 시작했지 않나 추측할 뿐으로 현재로서는 인천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시각이 절대적이다.

계란빵

인천 사람이어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계란빵의 출생지, 인천이다. 인하대 후문 건너편에 있고 지금도 처음 계란빵을 판 가게가 유지 운영되고 있다. 어디를 가나 계란빵 맛은 다 똑같지만 최초로 계란빵을 팔았다는 점에서 찾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정말 최초인가 하는 의구심도 있지만 대부분의 계란빵은 노점이라 기록이 없고 이곳은 가게이고 인하대 학생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인식된 경우라 최초 발생지로 보는 시각이 크다. 실제 이보다 더 오래 먼저 최초로 계란빵을 만들어 팔았다는 사람의 소식은 없다. 가게 상호도 원조통계란영양빵으로 원조임을 알리고 있다. 생각보다 줄 서서 사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꾸준히 찾는 손님이 있다. 인터넷에 "인하대 계란빵"을 검색하면 무수히 많은 리뷰를 볼 수 있다.

아귀찜

인천에서는 물텀벙이로 알려진 아귀찜이 있다. 물텀벙이골목이 따로 있고 부평 쪽에도 존재한다. 인천의 유명 아귀찜 가게가 몇 있는데 원조는 아니고 맛으로 유명해진 거라 원조의 의미는 크게 없다. 다른 지역과 최초 논란이 약간 있지만 물텀벙이로서 음식 문화를 만든 건 인천이 앞서기 때문에 아귀찜 역시 인천이 최초로 발생된 원조 지역으로 보는 편이다.

바지락칼국수

아귀찜과 함께 원조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바지락칼국수 역시 인천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편이다. 동인천에는 지금도 칼국수집 골목이 있는데 (답동성당 아래, 현재는 쇠퇴) 일반 칼국수는 인천이 최초 원조라고 할 순 없으나 바지락칼국수만큼은 인천을 최초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실제로 인천 내륙이 아닌 바닷가 쪽과 영종도에서도 바지락칼국수는 쉽게 볼 수 있는데 인천이 바지락이 많이 나와서가 아니라 서해안의 해물이 집중되는 거대 항구가 어선의 경우도 인천항이었기 때문에 (소래 포함) 인천에 해물이 많이 몰려 그만큼 바지락 수급이 다른 지역보다 강해 만들어진 향토 음식으로 추정하고 있다. 태안 지방과 원조 개념을 견주기도 하나 조개구이 자체도 인천에서 태안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는 시각이 우세해 바지락칼국수 역시 조개구이와 함께 전파되어 내려간 것으로 본다. 다만 해물칼국수는 원조 개념은 없다. 그냥 바지락칼국수만 시초, 최초로 본다.

뼈다귀해장국

우리나라의 유명 뼈다귀해장국 프랜차이즈가 모두 인천과 부천에 뿌리를 두었다는 점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해장국으로 뼈다귀해장국을 손꼽는다는 점에서 짜장면과 함께 가장 성공한 음식 중 하나가 바로 뼈다귀해장국이다. 앞서 링크한 수인곡물시장 포스팅에서도 언급을 했었고 이전에 감자탕 이름에 대한 포스팅을 한 적이 있어 관련해 찾아보면 좋다. 인천의 미군부대, 인천 항구 노동자의 음식, 인천 수인곡물시장과 그 곡물시장 주변의 유명 보신탕(영양탕) 가게들, 뼈다귀해장국에 보신탕처럼 들깨가 많이 들어가는 것도 모두 동일 지역, 동일 선상에서 연관성이 있다고 추측하기에 뼈다귀해장국이 인천에서 유래했다는 점은 큰 논란은 없는 편이다. 참고로 인천에 미군부대가 부평에만 (조병창 자리) 있다고 아는 분도 있는데 인천상륙작전에서 보았듯이 인천은 미군의 진출 확보지로서 예부터 미군부대가 곳곳에 위치하고 꽤 많이 존재했던 곳이다. 맨 위의 인하대 개교 사진에서 미군과 미군 트럭이 등장하는 것도 그런 맥락. 

젓갈냉면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젓갈은 새우젓이다........ 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1박 2일 게임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까나리액젓이 인천의 대표 젓갈이다. 물론 소래포구가 성장하는 데 있어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꽃게와 새우젓이기 때문에 인천을 대표하는 액젓으로 새우젓도 분명 큰 지분을 차지하지만 인천 고유의 맛과 향을 내포하는 향토 식문화 차원에서 보면 까나리액젓이 인천 고유의 젓갈로 더 와닿는 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천에는 유일하게 젓갈을 넣어 먹는 냉면이 존재하는데 그게 바로 백령도 냉면이다. 까나리액젓의 주산지이기도 하고 까나리 자체가 백령도에서 주로 잡는다. 젓갈냉면이라고도 하고 백령냉면이라 하기도 하는데 평양냉면, 함흥냉면, 밀면의 유명세에 밀려 인지도는 상당히 낮지만 그래도 백종원도 찾아 먹을 만큼 인지도가 바닥인 건 아니다. 백령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천 도화동에서도 이 맛을 접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냉면처럼 백령도 냉면, 젓갈냉면 역시 북한 실향민에 의해 만들어진 북한 음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쫄면​

빠지면 섭섭한 녀석. 쫄면의 고향이 인천이다. 최초로 쫄면이 만들어졌다고 잘 알려져 있고 쫄면을 만든 제면소도 지금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 최근에는 입소문을 타고 제면소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어 쫄면과 함께 소스도 같이 판다고 한다. 동인천에서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는데 쫄면을 실질적으로 성공시켜 안착시킨 건 신포우리만두로 프랜차이즈로 성공한 인천의 몇 안 되는 가게이기도 하다. 현재도 본점이 신포동에 있다. 신포닭강정 먹고 시장 끝으로 나가면 신포우리만두 가게가 있다. 가게 상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만두로 유명했던 가게였는데 만두와 쫄면을 세트로 팔아 성공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쫄면을 시키면 만두도 자연스럽게 시키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신포우리만두에서 그렇게 팔았기 때문에 익숙해서 그런 거다.

사이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꼽푸(컵의 일본어) 없으면 못 마십니다. 인천 앞바다와 사이다의 연관성을 모르고 이 유행어를 따라 부른 사람이 꽤 많은데 사이다는 인천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희극인 서영춘이 사이다 노래를 부르면서 인천 앞바다를 넣은 것도 인천에서 사이다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향토 문화와 관련한 인천 지역 행사에도 사이다 행사가 종종 등장한다. 사이다를 최초로 만든 곳이 인천이기 때문. 당시에는 경인철도에서 열차 옆에 사이다 광고를 싣기도 했다.

홍어회

의아해하는 분도 있겠지만 우리가 아는 그 삭힌 홍어는 목포, 흑산도 홍어에 한정된 것으로 여기서 말하는 홍어회는 우리가 먹는 일반 회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삭히지 않은 생홍어를 회로 먹는 걸 말하는데 홍어회만 갖고 따진다면 홍어회 원조, 최초는 인천이다. 지금은 전라도에서도 삭히지 않은 생홍어를 갖고 회로 먹는 경우가 가끔 있으나 삭힌 홍어가 값이 더 나가고 찾는 이도 많기 때문에 대중적이진 않다. 물론 인천에서도 토박이보다 외지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향토 음식으로서 찾는 이는 극히 드물다. 다만 우리가 아는 그 흑산도 홍어와 인천 앞바다의 백령도, 대청도 홍어는 같은 부류로 수온에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는 정도만 있고 같은 홍어인데 흑산도는 삭히고 인천은 일반 회로 먹었기 때문에 홍어회(생)는 인천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이 된다. 지금도 동인천 쪽에서는 생홍어회를 파는 가게가 몇 있다. 인천은 삭힌 홍어를 먹지 않았고 서울 사람처럼 나중에 흑산도 홍어회를 더 자주 접했기 때문에 인천 사람도 인천 홍어회가 따로 있다는 걸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점자 송암 박두성 선생님과 훈맹정음

약간 논외지만 송암 박두성 선생이 인천 출생이다. 이 분의 업적과 관련해 송안 박두성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글 점자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훈맹정음으로 지금까지도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되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송암 박두성 선생의 기념관 역시 인천 (미추홀구)에 위치한다.

그 외 기타

참고로 커피와 관련해 인천이 최초로 커피를 마신 지역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이건 확실하지 않고 추정만 할 뿐인데 개항장을 통해 외국인, 특히 서양인이 들어오는 항구는 인천항이 그 역할을 주로 하고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모두 인천항으로 들어온 것도 그렇고 서양인들이 주로 묵었던 최초의 서양식 근대 호텔인 대불호텔에서도 차와 함께 커피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손님이 서양인들인 만큼) 대한민국에서 커피가 등장한 가장 오래된 기록물은 1884년 경에 나오는데 이때가 인천 개항이 막 시작된 직후이기 때문에 커피 역시 인천에서 최초로 들어와 마시게 되었지 않은가 하는 추측이 존재한다. 물론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신 건 다 아는 상식인데 최초로 커피를 마신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지 않다.

그 외 무역 상사, 외국인 묘지, 화교의 기원, 각국 조계지, 한국조폐공사 역할을 했던 인천전환국 (은화 제조), 관립해운회사, 재판소, 상업광고, 상인협회, 선물시장(주식 현물시장, 선물시장 할 때의 그 경제 선물시장), 신학 잡지, 유리공장, 도서관, 보이스카웃 등도 인천이 최초이고 우리나라 최초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풀어 쓰려했으나 글이 너무 길어 여기서 멈춤)

마지막 번외로 조선 3대 기차역이라는 것이 일제시대 있었는데 경성역, 평양역, 동인천역으로 당시 이 세 역이 조선의 3대 기차역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과 평양 인천이 바로 그 3대 기차역이 있던 지역인데 전국에서 이 세 곳이 제일 번화가였고 사람이 아주 바글바글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보물 창고를 보고 싶다면 인천 문화 탐방은 필수. 겉만 대충보면 별거 없는 마계촌 같지만 자세히 꼼꼼히 보면 아주 신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고 있는 도시가 여기 말고 또 어디있나 싶을 정도로 깡촌 모습도 도시화된 모습도, 미래의 모습도 다 갖춘 묘한 도시인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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