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이순신 말고도 다른 충무공이 있다 (feat 충무공 남이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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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전통역사

우리나라에는 이순신 말고도 다른 충무공이 있다 (feat 충무공 남이장군)

by 깨알석사 2016.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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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 위협을 무릎쓰고 임금을 받드는 것이 "충", 위엄을 크게 떨쳐 적을 무찌르고 적의 침입을 막아 물리치는 것이 "무" 그 둘을 합쳐 "충무"라고 하며 나라 안팎으로 발생한 국난을 진압하고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무관에게 주는 가장 높은 시호다. 시호를 붙여 그 사람을 높여 부를 때는 충무공이라고 부른다. 무관은 충무, 문관의 경우에는 충문으로 시호를 내리기도 하지만 충무의 "무"가 무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침입을 막고 물리치는 행위에 더 맞는 범위라서 신분과 상관없이 공적으로 시호를 내리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충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만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시호는 뜻풀이 그대로 위엄을 크게 떨쳐 적을 무찌른 사람에게 주는 시호로서 모두 9명이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다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워낙 유명한 위인으로 우리나라 대표 인물로 뽑다보니 이순신 장군만이 쓰거나 이순신 장군에게만 붙여준 시호로 착각할 뿐, 이순신 장군 이전에도 충무공은 있었고 이후에도 충무 시호를 받은 충무공들이 있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론 충무라는 시호가 역사적인 사건이나 시호를 내리는 임금의 개인 사리사욕에 따라 붙여 내려주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차 떼고 포 떼고 가장 합리적이고 명확하게 충무라는 시호에 맞는 건 역시 이순신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도 최고의 명장에게는 보통 충장 또는 충무라는 시호를 붙이며 대부분 이런 시호를 쓰는 장군은 우리나라 충무공처럼 최고의 명장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가진 9명에 대한 정보와 함께 특별히 남이장군 (충무공) 에 대한 부분을 다루어 봤다. 그 이유는 남이장군 관련 내용에서 다루기로 하자. 9분의 충무공에 대한 간략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충무공 조영무]

고려시대 말 장수로서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면서 조선 초기 무관으로도 활동한 인물이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개국공신이며 이성계의 휘하 장수로 활동했다. 이성계를 찾아왔던 정몽주를 이방원과 함께 추격하여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제거하는데 일조했다. 이성계의 장수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사람으로 옮겨갔고 절대적인 이방원 사람으로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왕권을 잡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방원 역시 그를 심복으로 매우 아꼈다. 1차 왕자의 난에서는 역시 이방원을 도와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도 했다.

아버지인 이성계와 아들 이방원을 도왔고 두 사람 모두 조선의 임금이 된 만큼 조영무는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다만 태조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 조영무를 붙여준 것이 아니라 이방원과 조영무가 친하게 어울리면서 이방원의 사람으로 옮겨가게 된 것인데 이를 매우 괘씸하게 여겼다. 후에 조영무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태조 이성계가 조사의에게 내리지만 조영무가 피신하여 실패한다. 2차 왕자의 난에서도 군대를 이끌고 이방원을 지원한다. 

호는 퇴촌으로 말년에 나이가 들어서 지금의 광주시 퇴촌면에서 탈 없이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현재 경기도 광주시의 퇴촌면이 퇴촌이라는 호를 썼던 조영무에 의해 생긴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퇴촌면 소개를 보면 일부 다른 기록에서는 퇴촌명 지명이 조영무 장군과 상관없는 것으로도 나오지만 그 기록 역시 매우 높은 관직을 가진 분이(고려시대 정3품이 문관) 퇴촌해서 살아 지명이 유래했다는 것으로 나와 결과적으로 고위직 벼슬을 지낸 분이 퇴촌(귀촌과 같은 의미지만 관직을 가진 자가 퇴직 후 내려온 곳)해서 생긴 유래라는 점은 같다. 

국란이나 외세, 왜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정권 창출과 관련해서 자신을 도운 부하 장수에게 임금이 시호를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 부하 장수로서 피를 대신 묻힌 경우라 우리가 알고 있는 충무공 시호와는 약간 거리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충무공 이준]

조선시대 세조 집권기에 벌어진 대규모 반란 이시애의 난과 관련이 깊다.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아들이다. (할아버지가 세종대왕임!) 의심이 많던 세조는 북방 장수들조차 믿지 못했는데 이로 인한 북방 세력의 견제와 멸시로 북방 출신 호족 이시애가 난을 일으켜 분란이 생기자 세조가 자신의 조카 관계인 이준에게 3만 군사를 주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토록 한다. 이 때 함께 출정시킨 장수가 남이장군(세조의 5촌 내종조카)으로 우리에게는 남이섬과 관련해 익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구 공신들을 견제하고 자기만의 세력을 키우려던 세조에 의해 신 공신측으로 분류되었던 이준은 이시애의 난 진압 성공으로 병조판서가 되었고 후에 영의정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영의정에 오른 나이가 불과 27세로 조선 역사에서 가장 젊은 정승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행실이 올바르고 모범적인 왕족으로 재능도 출중했으나 오히려 그런 남다른 실력이 견제 세력에 의해 가시가 되었고 이시애의 난을 함께 진압해 공을 세웠던 남이 장군과 함께 결국 쓸씁한 최후를 맞는다. 

다만 남이 장군이 역모로 몰려 바로 죽임을 당한 것과 달리 눈치까지 빨랐던 이준은 관직을 포기하고 물러나지만 존재 자체가 견제 세력에게는 여전히 부담되는 것이다 보니 결국 왕의 종친 세력에 대한 반대 세력에 의해 유배를 당하게 되며 결국 유배지에서 사망하게 된다. 

남이 장군이 처형 당할 당시의 영의정이 바로 이준이었는데 남이 장군이 역모라는 모함에 걸려 처형 당하는 걸 보고 3년 후 과감하게 영의정 자리를 포기하고 관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


[충무공 남이]

우리에게는 남이섬으로 많이 알려진 장군으로 소년 장군(아기장군/애기장군)이라는 별칭도 있다. 구상군 이준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인물로 나이가 어리면 무서운 게 없다는 말이 지금도 가끔 사용되는데 소년 장군이라는 별칭만큼 이른 나이에 성공한 인물로 역사 기록에서도 그의 무공 실력과 능력은 뛰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시애의 난과 건주여진 토벌에서도 공적을 세운 남이는 그가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는 실록 내용이 있을 정도로 혈기가 왕성하고 용맹한 장수였다. 그의 용맹함 덕에 27세 이른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반대로 나이가 어려 크게 보는 안목이 부족해 결국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는 의견으로 양분된 인물이기도 하다.

칼을 들고 싸우는 장수로서는 탁월했을지 몰라도 말로 싸우는 정치에서는 한 수 아래였다는 평이 많은데 그가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도 결국 그런 부분이 컸기 때문이다. 특히 이시애의 난을 함께 진압했던 이준은 급제하여 벼슬에 오른지 이제 겨우 1년차에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이시애의 난에 투입되었고 자신은 7년차에 투입된 만큼 대우가 달라야 했음에도 이준은 영의정까지 오르고 자신은 병조판서까지밖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 있는데 문제는 그걸 그대로 표현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장수로서는 대적할 만한 적이 없다고 볼 수 있지만 정치에서는 적을 꾸준히 만들고 대립하게 되는데 특히 한명회와 신숙주 등의 원로 대신들과도 대립하고 불만을 가졌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수준이었다. 

1467년 기록에는 문제를 일으키던 도적떼를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나라에 분란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출정해서 해결하는 무장이었다. 할머니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딸 정선공주(전주이씨)로 왕족이다. 아버지는 군수 남빈,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의 딸, 부인이 좌의정 권람의 딸(안동권씨)이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곤이 남이의 일족이고 후대인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인물 역시 남이의 후손인 남공철이다. 

남공철은 남이 장군이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고 순조에게 주청하여 결국 남이 장군의 누명을 벗겨주어 복권 되었다. 남이 장군은 유자광, 한명회, 신숙주에 의해 역모를 했다는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 되었는데 장인이었던 권람은 물론 부인이었던 권씨 부인이 일찍 요절하여 처가의 도움은 크게 받지 못했다.

역모라는 누명을 썼을 때 당장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좌의정을 지낸 장인이 있는 처갓집 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장인과 부인이 일찍 사망한 상태라 관계가 소원한 사이였다. 권세가인 장인의 옛 동료 한명회와 신숙주에게 구명 요청을 했으나 거부 당하고 처갓집에 있는 처남들 마저도 누이(권씨부인)가 일찍 요절해 관계가 없다며 오히려 권씨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급급했기 때문에 처가의 도움은 일절 받지 못했다. (처갓집 권씨 가문도 남이로 인해 일가족 모두 함께 처형 당할 위기였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역모가 괜히 무서운게 아님)

남이 장군은 유자광에 의해 계획된 음모의 희생자라는 것이 통설인데 이시애의 난에서 함께 공을 세웠던 유자광은 세조가 남이 장군을 특별히 아끼자 시기 질투하여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세조 다음 예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예종 역시 남이 장군을 시기 질투하였는 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공주와 간음했다는 풍문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는 모함에 걸려 영의정 강순과 함께 투옥 당하고 결국 얼마 못가고 거열형 (팔, 다리, 목에 줄을 달아 말이나 소에 묶고 온 몸을 찢여 죽이는 형벌) 이라는 잔혹한 처벌로 생을 마감한다.

그를 변호한 자도 처형하고 그의 어머니도 아들과 간음했다는 누명을 씌워 마찬가지로 능지처사 (머리 몸, 팔, 다리 등 사지를 절단해 죽이는 형벌) 당했으며 권씨 부인이 일찍 죽어 새로 맞이한 부인은 남이장군과 함께 마찬가지로 처형 당했다. 남이 장군에게는 첩도 두명 있었는데 모두 모함을 계획한 자들의 노비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고(첩 중 한명인 탁씨 성의 탁문아는 궁궐 연회에도 참석했던 기생 출신으로 집안 노비였다가 데리고 간 자가 임금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관비로 보내지게 된다) 아들이 없던 남이 장군에게는 딸이 한명 있었는데 역시 반대 세력의 하나였던 한명회의 노비로 끌려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충무라는 시호는 당시에 받은 건 아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죽었다고 하여 후손 남공철에 의해 복권되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9일전에 (1910년) 비로서 뒤늦게 충무라는 시호를 조선의 사실상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순종에게서 받게 된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약 106년전에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특별한 케이스, KBS에서 역사를 다루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남이 장군을 다룬적이 있다. (2014년 방영됨) 

남이 장군의 묘소가 남이섬에 있다고 해서 남이섬으로 불리우게 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 남이 장군의 묘는 경기도 화성시에 있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번지) 남이장군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13호로 등재되어 있고 경기도에서 관리를 받는 유적지다. 문화재청 및 한국관광공사나 경기도 관련 홈페이지에도 남이장군 묘에 대한 유적지 정보는 화성시로만 안내되며 남이장군 묘로 남이섬(유적지가 아닌 관광지로는 홍보함)을 안내하지는 않는다. 

남이섬에도 남이장군 묘가 있지만 이는 가묘(허묘)이고 남이섬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묘로 남이장군의 묘가 있다라고 하는 돌무더기가 예전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그 돌무더기에 봉분을 쌓아 따로 만든게 남이섬의 남이장군 묘다.

역사적인 평가와 남이 장군의 활약성은 이른 나이에 극형에 처해져서 많지는 않지만 대체로 토벌대장으로 난을 진압하고 도적과 여진족을 토벌한 기록을 보면 백성에게는 인기가 좋은 장수로 보인다. 한성(한양)에서 나고 자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남이 장군의 묘가 왜 화성시 말고도 남이섬 근방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인데 그의 죽음이 역모라고 해도 그것이 누명이라는 걸 백성들은 알았는지 그를 추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남이 장군은 경기도 남양주와 가평 등지의 축령산에서 무예를 닦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곳이 남이섬과 가깝다. 축령산에는 지금도 남이 바위가 있으며 가평은 남이섬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남이섬은 출입하는 쪽이 경기도 가평이고 배를 타고 들어가면 강원도 춘천시가 된다, 남이섬 상단에 위치한 멀지 않은 자라섬은 반대로 경기도에 속한다, 청평댐으로 인해 생긴 두 섬은 같은 한강에 비슷한 위치의 섬인데 위쪽 자라섬은 경기도 관할이고 아래쪽 남이섬은 강원도 관할로 경기도와 강원도의 행정구역 경계가 바로 이 물길이다. 두 섬은 각각 경기도와 강원도가 하나씩 가지고 있다. 

남이 장군이 왕래했던 지역이다보니 연관성이 없는 건 아니고 그가 거열형이라는 극형에 처해 죽자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그 지역의 백성들이 돌무덤을 따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이 장군 묘에 대한 정보를 찾다보면 화성시와 춘천시 말고도 몇 군데 더 있는데 대체로 역모로 인한 처형을 당한 남이 장군의 특성상 묘를 쓴다는 것 자체가 여러운 일이고 자칫 잘못하면 묘와 남은 가족이 헤코지를 당할 위기가 있을 수 있어 가묘가 많다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 묘를 감추기 보다 드러내고 여러 가묘(허묘)를 썼다는 말 자체는 약간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이다. 남이 장군의 집안 사정을 안다면 가묘 조차도 부담스러운 건 당연. 아예 이름을 숨기고 묘비와 봉분을 다른 사람 이름으로 숨기는 것이 더 현실성 높다.

결국 이는 남이섬의 돌무덤처럼 남이 장군과 관련이 있는 지역의 백성들이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추모하기 위한 백성들의 자발적인 위령제용 가묘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만큼 이순신의 활약상처럼 남이 장군도 당시 난과 도적떼를 토벌하면서 나름의 소문이 돌았을 것이라고 보는데 서울시 용산구에 남이장군 사당이 지금도 있고 경상도와 경기도에도 남이 장군 관련 지명이나 전설이 남아 있을 만큼 당시에는 대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무속신앙에서 애기장군, 아기장군으로 장군신을 모시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무속에서 말하는 아기장군, 애기장군은 대체로 이 남이장군을 뜻한다고도 보고 있다. 20대 나이에 일찍 죽은 남이 장군은 권씨 부인과 결혼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진 편이다. 여러 방송에서 남이 장군을 설명할 때 권씨 부인과 만나게 된 계기를 빼놓지 않고 설명하는 편인데 그게 쉽게 상상이 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에 남다른 능력으로 귀신을 볼 수 있다는 남이 장군은 어느 집에 귀신이 든 것을 보고 큰 소리 한방으로 죽어가는 그 집의 처녀를 구해내는데 그게 바로 권씨 부인 당사자로 알려져 있다. 귀신마저도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설화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이 부분도 남이장군이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될 수 있다. 결국 가족들이 묘를 일부러 여러곳에 가묘를 둔 것이라고 보기 보다는 각 지방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가묘라고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남이 장군의 묘는 가묘(허묘)가 많은 상황이라 이곳 마저도 허묘가 아닌가 하는 오해가 있는 편인데 화성시는 남이 장군의 외갓집이 있던 지역으로 외가에서는 어머니 홍씨만 죽임을 당하고 멸족은 면했던지라 어머니 "홍씨" 집안에서 죽임을 당한 남이 장군을 안타깝게 여겨 수습해 남몰래 묘를 만들고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남이섬이 남이 장군의 성지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름 자체가 남이섬이다 보니 더더욱 그렇고 남이섬에도 남이장군 묘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화성시의 진짜 묘는 사람 찾는 발길이 거의 없고 남이섬의 엉뚱한 묘를 찾는 경우가 많은 것도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남이장군 묘 때문에 남이섬을 가는 건 아니지만..)


무엇보다 남이섬하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민씨 집안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민병휘, 민대식, 민병도로 이어지는 부자관계는 친일파 관련해서는 항상 언급되는 집안이며 지금 남이섬은 민씨 가문의 개인 소유가 아닌 남이섬(주)라는 별도의 회사라고 말장난을 하지만 그 운영회사의 주주가 민씨 가족이라는 건 매 한가지, (어디서 장난질을...)

어떤 면에서는 남이 장군은 호국영령이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사용하는 장수 중 한명인데 이런 분의 이름과 묘를 관광지에서 그것도 친일파 가족이 이용한다는 건 여전히 좋은 모습은 아니다. 태평양 전쟁에 협조하고 일본을 위해 국방헌금을 냈음에도 한국은행 총재까지 했던 집안이라 뭐 딱히 이상할 것도 없지만 친일파 재산 환수조치에서 이 집안도 포함이 되었었는데 남이섬이 여전히 그대로인 걸 보면 환수조치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후손이 환수에 반발해 소송을 하기는 했다/그전에 이미 빼 돌릴 건 다 빼돌렸겠지만..)

남이 장군의 후손이나 가문에 관련된 사람도 아닌 엉뚱한 사람이 남이 장군 이름덕으로 살아가는 것도 다소 우습지만 하필 그게 왜 친일파 민병휘의 후손들이냐는 것도 되짚어보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한달 전 8월 말에 불가리아 교수 한 분이 우리나라를 찾았다. 이름은 카멘 남, 북한의 남승범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수와 불가리아 소피아국립대 예카테리나 교수가 카멘 남 교수의 부모로 북한의 남승범 교수는 불가리아 유학 중 불가리아 여인인 예카테리나 교수와 결혼했다. 

북한 김책공업종합대학의 남승범 교수는 남이 장군의 18대 후손으로 카멘 남 교수는 19대 후손이 된다. 귀국 명령이 떨어져서 북한으로 돌아가게 된 남승범 교수는 부인과 어린 자녀(카멘 남 교수)를 두고 돌아가야 했는데 북한에 돌아가서 새 가정을 꾸미게 되고 그 자녀 중 한명(남승범 교수가 북한에서 얻은 딸)이 탈북을 하게 되어 이복형제간 만남이 성사된 자리였다. 

교수라고 하지만 한 사람은 아버지 없이 어렵게 자랐고 아버지와 살았지만 생활이 궁핍해 결국 탈북자 신분으로 살아가는 후손을 보면 남이 장군의 가문을 보는 입장은 여전히 씁쓸하다.


[충무공 김시민]

파직과 복직, 사직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는 인물로 용맹과 자존심이 강한 장수이지만 때로는 윗 사람에게 대적하고 아랫 사람과 백성을 잘 관리하지 않아 벼슬 자리가 평탄하지는 않았던 인물이다. (뭐 따지고 보면 이신순도 평탄한 삶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사망한 진주목사를 대신해 진주성을 지켰고 곽재우 등의 의병과 연합해 적을 여러차례 물리친 공로가 있다. 충무라는 명장 만큼 이순신의 명량해전(명량대첩)처럼 김시민에게도 진주대첩이라는 주요 사건이 포함된다. 진주의 영웅이라는 애칭이 있을 만큼 진주성 방어에 큰 공을 세웠는데 전라도를 노리던 일본군이 진주성을 통과해야 하는 시점에서 3만 왜군을 4천명 군사로 막아야 하는 절대적인 약세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전을 이끌게 되며 진주대첩이라는 승리를 안겨준다.     

이순신과 비슷하게 전투 중에 왜군이 쏜 탄환에 의해 치명상을 입게 되는데 결국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사후에 그에게 충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순신 만큼 일본에 역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조선의 명장으로 알려졌으며 김시민이 있는 진주성을 반드시 함락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일본이 갖게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다루는 전쟁사에서 조선의 맹장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육상의 김시민 장군과 해상의 이순신 장군이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일본 왜구가 이순신을 가장 두려워 했다고 알고 있지만 이순신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건 육상의 김시민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고문서에도 마찬가지지만 진주성을 다시 또 함락하기 위해 온 것도 그런 이유/결국 함락)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딴 충무라는 지역이 꽤 많은데 진주에서도 충무공동이 따로 있다. 다만 이순신이 아닌 김시민 장군을 의미하며 김시민대교라는 사장교 역시 진주에 위치하고 있다. 해상의 이순신과 사실상 동급 신화적인 인물이라 진주의 영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고 이순신과 더불어 충무공이라는 시호에 가장 어울리는 분이기도 하다.

[충무공 김응하]

고려 명장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으로 함경도 변방에서 나라를 지킨 장수다.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침범하자 명나라의 원군으로 나가 싸우다가 전투 중에 사망했다. 누르하치의 후금이 명나라를 침범해 명나라와 여진족, 그리고 조선까지 연합군을 조성해 참전하게 되는데 그 때 조선군으로 참전한 것이 김응하 장수다. 당시에는 보기 힘든 대규모 전투로 알려진 것이 샤르후 전투로 지금으로 따지면 연합군이 되어 파병을 간 셈이다.

조선이 후금과 명나라 싸움에 개입한 건 임진왜란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지원병을 보내주었기 때문에 명나라 싸움에 조선도 파병을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샤르후 전투는 조선군에게 엄청난 큰 피해를 줬고 김응하 장수 역시 여기서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이후 후금이 이름을 청나라로 바꾼 뒤에 13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건 다 아는 사실 

어떤 활약상으로 왜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는지에 상세한 기록은 없는 편이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활약을 했고 샤르후 전투에서도 활약을 했다는 것이 가장 크게 알려진 사실인데 아마도 샤르후 전투가 명나라에 파병을 보낸 것이고 명나라에서도 김응하 장수의 사망 후 명나라 벼슬을 따로 챙겨주었다는 걸 본다면 양국간의 협력과 외교 차원에서 희생당한 장수를 높게 평가하기 위해 충무라는 명장으로 인정하지 않았나 싶다.

[충무공 구인후]

인조의 외사촌으로 인조반정의 공신 중 하나다. 인헌왕후의 조카로 무과에 급제해 무신이 된다. 진도 군수로 있을 때 광해군에게 반감을 품고 인조반정 계획에 동참했으며 이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왕을 보호하고 군사를 이끌고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말년에 우의정를 거쳐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별 다른 어려움 없이 생을 마감했다. 왕의 정권 창출과 왕을 근접해서 호위했던 것이 아무래도 충무라는 시호를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충무공 정충신]

전라도 나주의 노비 출신으로 고려의 명장 정지의 후손이나 어머니가 노비 신분이라 노비 신분을 이어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 휘하에서 함께 했고 국경 수비 임무를 담당했다. 민첩하고 영리하다는 평을 받아 권율의 신임을 얻게 되는데 이후 선조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줌으로 인해 무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다만 노비 신분의 졸병 신분인 자가 어떻게 중앙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선조가 알게 되었는지는 그 과정이 흔한 경우는 아닌데 임진왜란이 생겨서 권율 장군 아래에서 심부름꾼 역할을 하게 되고 영리하고 민첩함을 인정 받아 권율의 신임을 얻은 상태에서 권율 장군이 피신을 간 선조에게 보내는 장계 (임금의 명령을 받고 나간 신하가 임금에게 보고하는 것) 를 가지고 선조에게 간 자가 바로 정충신

일반 상황에서는 왕을 만나는 것 자체가 힘들고 상상하기도 힘들뿐더러 장계를 가지고 갈 대상도 아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상황과 왕의 피신이라는 상황이 겹치면서 야지에서 야전 사령관이 보내는 보고서를 야전에서 마찬가지로 피신 생활을 하는 왕에게 보내야 하기 때문에 그 연락꾼이 된 정충신이 왕을 직접 만나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졸병에서 시작해 장군까지 올라 온 능력과 실력으로 승승장구한 입지적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이항복의 제자가 되어 무관길에 들어서는데 이항복은 바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이다.

정충신은 조선의 사신으로 후금에 가기도 했으며 이괄의 난이 발생했을 때 진압에 성공하기도 한다. 다방면에 해박하고 청렴하기로 소문이 나서 두루두루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권율 아래 있을 때부터 민첩한 실력으로 첩보 요원 역할을 했는데 이후에도 무관으로서는 갖기 힘든 외교술과 첩보전 능력은 정충신의 가장 뛰어난 능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상당기간 최전방에서 무관으로 복무 했으며 친했던 이괄이 난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했을 때도 친분을 떠나 그를 진압함으로 공적을 크게 인정 받는다. (나름의 공과 사 구분)

말년에 병이 들어 사망하게 되는데 옳은 성격과 강직한 성품으로 밉보인 적도 많고 이괄의 난을 진압했지만 그와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여전히 의심을 받아 대접은 그렇게 좋다고 볼 수 없다. 그의 군호, 방호인 금남은 지금도 광주광역시에서 볼 수 있는데 금남로가 바로 정충신의 금남을 따와서 만든 도로명이다. 선봉에 앞장서는 장수 보다는 지략으로 참모 역할을 더 잘하는 참모형 스타일로 명장 보다는 덕장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부르는 인물이다.

[충무공 이수일]

충북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된 것이 충무공 이수일의 묘다. 충주 사람으로 북방에서 근무를 했고 임진왜란 당시 큰 활약을 했다. 여러차례 왜군을 격퇴했고 여진족과 야인 토벌에도 앞장 선 인물이다. 충무공 정충신과 마찬가지로 이괄의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여진족과 야인 토벌에도 앞장 선 인물이지만 의외로 많이 알려진 것이 없고 기록도 많지 않은 편이다.

아버지가 영의정, 아들은 우의정에 오른 것으로 나오며 경주이씨 국당공파로 부인 (전주 이씨) 과 합장되어 있다. 경주이씨 국당공파로 알만 한 사람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네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의 대한 정보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모르는 사람이 있간...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충무공 아홉 분에 대해 알아봤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적절한 시호를 받은 분도 있고 아닌 분도 보이지만 대체로 대부분의 충무공 할아버님들이 "임진왜란"과 관련이 깊다는 걸 알 수 있고 특히 일본 왜구와의 싸움에서 충무 정신이 발휘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역대 충무공 장군들이 일본과의 싸움에서 괄목한 성과를 냈다는 건, 역시 일본과의 싸움 만큼은 절대적으로 중요시 했다는 말도 된다. 가깝고도 먼 나라가 일본이라고 하는데 충무공 이야기만 보면 틀린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아홉분의 충무공 시호를 쓰는 장군들을 알아봤는데 문득 떠오른 장군이 한명 더 있다. 지금 우리나라 안보와 국방에서 절대적인 위협이 되는 건 아쉽게도 북한이라는 한민족, 이 북한과의 대결에 최적화 된 장군이 한명 있다

30대 이상의 연령자에게는 또 하나의 대장군이 있었으니 그 이름도 용맹한 똘이장군~

간첩 잡는 건 역시 똘이장군이 쵝오제~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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