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를 다루면서 역사저널 그 날에서 나왔던 동북 9성, 현재 윤관에 의해 여진 정벌 당시 획득한 동북 9성의 위치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상당히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이지만 학교에서 시험 문제로 출제되지 않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대략 어느 위치로 짐작은 할 수 있으나 그 지역이 북한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만주 지역으로 추정만 할 뿐이고 또한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동북 9성의 위치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시비를 걸고 있어 논란에 빠졌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 고유의 역사이고 중요한 지역인데도 역사 과목에서 크게 다루지 못하고 학생들에게도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게 동북 9성이다. 여진족과 담판 싸움으로 고려가 획득한 9개의 성은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의주, 통태진, 평융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9개의 성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조선으로 넘어오면서도 세종대왕이 이 동북 9성에 큰 관심을 보였고 당시에도 동북 9성의 위치를 찾기 위해 노력했었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에 동북쪽으로 선춘현에 이르기 7백여 리이다 라는 기록이 있고 윤관이 여진을 정벌 한 이후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고개는 종성에서 곧바로 700리 북쪽에 있다라고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두만강 북쪽 700리와 기타 여러 역사 기록에 따르면 우리가 주장하는 지역이 동북 9성일 확률이 매우 높다.
같은 여진 정벌이고 같은 상황인데 서희의 강동 6주는 학교 시험에 나오고 윤관의 동북 9성은 시험에 안 나온다.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학생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려가 2차 여진 정벌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전략을 썼고 무엇보다 1차 여진 정벌에서의 실패를 거울 삼아 철저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인데 그 정벌로 어렵게 얻은 동북 9성을 몇년 못 가고 관리 부재로 다시 돌려주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지역임에도 위치를 못 찾고 있다는 건 아쉬움이 크다.
동북 9성의 위치가 어디쯤인 것 같냐는 물음에 동북이라는 단어만을 가지고 대강 유추한 이윤석, 하지만 천리장성인 국경지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사이에 여진이 있으니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이야 미국이 알레스카, 하와이 등 본토와 여러 지역이 떨어져 있는 경우가 흔하고 가능하지만 과거에는 영토가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관리가 힘들고 가는 길목 자체가 남의 영토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 더군다나 무슨 일이 생겨도 본토에서 즉각적인 지원이 어렵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는 천리장성이 국경이다. 국경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느냐는 사학자의 일침에 해안가를 따라 영토를 더 만들어 주는 이윤석 ㅋㅋ..."9" 숫자 모양으로 고려 땅으로 이어준다.
이윤석이 추정한 동북 9성의 위치와 고려의 영토, 고려와 동북9성은 해안쪽 일자로 연결
두만강 위쪽으로 700리, 이윤석이 그린 동그란 지역이 정확하게 맞았다. 웃자고 그린 그림이 실제였음
이윤석 본인도 당황하고 놀람. 제대로 그렸다고 한다.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들은 두만강 북쪽 700리설을 부정했는데 일본인 학자들은 동북 9성이 함흥평야 일대라고 주장했다. 천리장성 바로 위, 함흥냉면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함경도의 함흥평야를 말한다. 처음에 이윤석이 그린 그림처럼 고려 본토와 너무 멀리 있으며 그렇게 먼 곳 까지 고려가 진출했을리 없다는 이유, 동북은 조선 경계인 두만강 위쪽이 아닌 고려의 경계인 함흥지역이라고 일본인들은 단정 지었는데 이미 다른 기록물에 두만강 위 700리 라는 근거가 있음에도 한국사 전체를 깍아 내리기 위한 일본 학자들의 계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인 학자들이 일제시대 주장해서 현재는 두만강 위 700리 설과 함흥평야 설 두가지가 공존 중이다. 이런 양분된 설이 있다보니 역사책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하필 두 지역 모두 한쪽은 중국, 한쪽은 북한 지역이라서 검증하기가 어려워 현재 제대로 된 동북 9성 교육이 안되고 있다. 강동 6주는 한반도에 있다보니 논란이 없었던 걸로 보이나 강북 9성은 두만강 700리 설이 한반도 밖의 영토이다 보니 일본인 학자들이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이유로 보인다.
강동 6주와 동북 9성은 모두 한반도에 있으무니다. 두만강 위 만주 땅에는 고려가 절대로 가지 못했스무니다. 그럴리 없스무니다. 고려는 천리장성 바로 앞 밖에까지만 진출했지 두만강을 넘어 여진 땅으로 넘어가지 않았스무니다 라는게 현재 상충된 의견이다.
현재 우리나라 학자들이 기록과 역사에 근거하여 제시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설의 위치, 이윤석이 그린 9의 모양과 거의 일치한다. (이윤석이 학자네 ㅋㅋ)
고려의 국력을 총동원했던 것이 2차 여진 정벌이고 결과적으로 대승을 이루어 여진을 고려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로 동북 9성을 얻었는데 함흥평야 땅을 뺏었다는 건 말이 안된다. 더군다나 2년 후 동북 9성이 멀리 있어(!)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또한 여진에서도 다시는 고려에게 까불지 않겠다는 이유로 동북 9성을 돌려달라고 했는데 애초에 함흥지역에 동북 9성이 있었다면 관리가 안 되었을리가 없다.
말 그대로 너무 멀리 영토가 떨어져 있어서 결국 반환 조약을 다시 체결하게 된 걸로 보아 결국 동북 9성은 고려 본토에서 상당히 멀리 있었다는 게 더 신뢰성 있는 말이다.
고려사 열전에도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간의 사이가 너무 멀며...라는 기록이 나오며 무엇보다 조선시대에 세종 때 개척한 6진과 거의 일치하는 지역이 바로 동북 9성(두만강 위 700리)이라는 점도 남달리 볼 내용이 아니다. 함흥지역이 동북 9성이라면 강동 6주도 관리가 안되어야 하고 9성이 위치한 전체 땅이 넓고 심지어 9성간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한 것도(함흥평야가 넓어봤자 함경도 전체보다 못하다) 강동 6주 지역과 비교하면 함흥평야 일대설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 된다.
애초에 고려에서 동북 9성을 두만강 일대에서 가졌기 때문에 우리 땅이라는 역사 의식이 있었고 조선시대 와서도 우리 땅이라는 의식이 있어 세종이 6진을 세웠다는 것이다.
세종은 특히 동북 9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세종실록 1439년 8월 6일 기록에 따르면 <선춘점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찾을 수 있는가> 라는 기록이 있어 윤관이 세웠다는 비를 찾아보도록 했고 또한 <윤관이 9성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공험진의 어느 쪽인가> 라고 물어봤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남아 있다. 결국 조선시대 세종이 개척한 6진은 이런 고려시대 동북 9성의 위치를 토대로 개척한 땅이라고 봐야 하며 6진을 개척할 때도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윤관의 동북 9성과 세종의 6진으로 인해 지금의 대한민국 영토가 확립되었다는 점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며 이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한반도 땅은 대한민국 조선 땅으로 존재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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