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보다 양념이 더 부각된 약간은 불편한 다큐 - 직지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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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리뷰

재료보다 양념이 더 부각된 약간은 불편한 다큐 - 직지코드

by 깨알석사 2018.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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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주말 늦은 시간 TV 앞에 있었다면 KBS1 채널에서 해주는 직지코드라는 이 영화를 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중파 채널만 하더라도 SBS에서는 막 "폼나게 먹자"가 끝나기 직전이었고 그 시간 자체가 새벽 1시를 달리는 시점이라 보던 방송이 끝나면 여기서 이불 속으로 들어간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MBC 에서는 "나 혼자 산다"라는 전체 방송 예능 1위 간판 프로그램도 막바지 달리기를 하는 중이었고 KBS2 마저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방영을 막 하려는 시점이라 사방에 볼거리가 있는 당시 시점에서 KBS1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공중파에서 그것도 주말 밤에 방영을 했지만 워낙 시청 시간대 입지가 좋지 않아 본 사람보다 보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을 것 같다.

KBS1 채널에서는 독립영화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직지코드> 다큐 영화를 방영했다. 우리나라 국사를 배웠다면 누구나 들어봄직한 "직지" 그리고 금속활자 인쇄물 이야기에 대해 어느정도 안다. 또 쿠텐베르크보다 우리가 더 빨리 금속활자를 가지고 인쇄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 배우거나 들었기에 낯설지 않는 주제다.

직지와 금속활자 이야기는 이전에도 여러차례 방송에서 다큐로 다루어 진 적이 있다. 또 우리가 지금 이용하고 있는 KTX 고속열차 (프랑스 TGV) 도입 및 선택 과정에서 직지와 규장각 의궤 등의 반환 조건이 프랑스 TGV 보다 더 좋다는 일본 신칸센을 누르고 선택하게 된 결정적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만큼 우리에게는 조금 더 특별하고 값진 보물이라 역사와 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참 반가운 영상이라 할 수 있겠다.

국사 시험 문제 및 공무원 시험에서도 종종 관련 문제가 나오기 때문에 잘 아는 분도 있지만 직지에 대한 기본 정리부터 하자면 직지는 불교서적으로 예전에 직지심경이라는 말로 먼저 알려지기도 했다. 현재는 직지심체요절로 고쳐 부른다. 직지심경의 "경"은 경전이라는 말처럼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 정리한 것, 기록한 것을 말하는데 직지가 발견될 당시 직지 하단에 직지심경이라는 누군가의 메모가 (정리표) 있었기에 직지심경이라 먼저 알려지게 되었으나 이후 직지 내용이 부처님의 말씀 뿐 아니라 고승, 명승 등의 이름 난 스님들의 말씀이 함께 있고 대부분 불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 마음을 다룬 내용으로서, 부처의 말씀이기 보다는 해탈의 경지로 가기 위한 불자의 자세에 대한 정리에 더 가까웠다. 이 책은 부처님의 말씀보다는 불자의 자세 교본, 불교인들이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수행자 지침서라고 볼 수 있는데, 수행자에게 필요한 여러가지 구절을 정리한 책이라 심"경"이 아닌 요"절"로 고치게 되었다. 경이 아니니 불경에 해당하진 않는다. 

직지는 백운화상 경한이라는 분이 만든 책으로 1299년~1374년까지 살았던 고려 말의 고승이다. 전라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며 스승을 따로 두지 않고 여러 유명 사찰을 다니며 수행한 스님이다. 중국으로 건너 가서 석옥 청공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청공선사와 인연이 있던 나옹선사가 중국에서 불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백운화상에 대해 공민왕께 고하니 공민왕은 백운화상에게 신광사 주지를 하도록 명하였고 이후 백운화상은 왕비 노국공주의 원당으로 창건한 흥성사의 주지로 이어진다. 말년에는 여러 암자를 찾아 다니며 한가로이 머물다 가고 했는데 공민왕 23년 여주의 취암사에서 77세 나이로 입적한다. 직지의 저자인 백운화상은 고려 말 태고국사, 나옹선사와 함께 대표적인 3대 큰 스님 중 한 분으로 꼽는다.

직지는 금속활자로 만들어진 최초의 인쇄물이다. 직접 쓰지 않고 활자를 (움직이는 글자) 썼으며 그 재료가 목재가 아닌 금속, 쇠를 사용함으로 현대적인 인쇄기의 시초와 연결 짓는다. 글을 쓰는게 아닌 찍어낸다는 것, 즉 "출판"이 가능하다는 걸 공식적으로 증명한 최초의 활자본이 바로 "직지"다.

물론 활자본 자체만 놓고 보면 최초는 아니다. 직지 이전에도 목판본 제작은 성행했고 목판 인쇄물도 여럿 있다. 또 금속활자본도 직지 (1377년) 이전에 만들어진 책이 있다. (1234년에 제작된 상정고금예문) 무려 직지보다 100년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본인데 실물로 존재하지 않고 행방불명되어 기록상으로만 존재한다. 항간에는 직지가 최초가 맞다고 하지만 이건 실물이 존재하는 현존의 기준이고 기록상 책의 제목과 내용, 발간 과정(금속활자 인쇄)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면 당연히 실체가 있었다는 걸 의미하기에 실물이 남아있지 않을 뿐 최초는 상정고금예문이고 금속활자 인쇄가 이루어진 시기는 1300년대가 아닌 1200년대가 맞다. 누군가 새로운 걸 발명했고 기록으로 그 발명품에 대해 남긴 것이 확인된다면 실물이 없다고 해도 실물이 있는 그 다음 것이 최초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실물이 없지만 1200년대 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인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금속활자를 이용한 최초 인쇄는 상정고금예문이, 현재 금속활자 인쇄를 통해 만든 책 중에 실물이 보존되어 확인이 가능한 최초의 책은 직지라고 구분하는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직지도 실물이 있는지 몰랐을 때는 최초가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는 대체로 직지가 쿠텐베르크의 인쇄물인 42행 성서 (성경) 보다 훨씬 빨리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더 먼저 금속활자를 이용했고 인쇄를 했다고 배우고 가르친다. 서양에서는 아직도 쿠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를 최초로 했다고 가르치면서 우리 직지와 관련한 금속활자 인쇄에 대해 누가 최초이고 누가 먼저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을 불편해 한다.

서양은 서양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각자 기준에 따라 알아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데 상식적인 입장에서 보면 쿠텐베르크 이전에 금속활자 인쇄가 있었다면 쿠텐베르크가 아닌 그 이전 고려라는 나라의 최초 인쇄물과 인쇄기술에 대해 배우는 게 맞지만 서구 중심 문화에서는 자기들이 한 것이 최초이고 먼저라는 인식이 있어 교육과 전달이 쉽지 않다는 인식 문제가 있다. 기존에는 누가 먼저인가가 금속활자에 관한 논쟁 전부였고 그게 가장 컸다. 우리가 대부분 잘못 되었다고 지적하는 것도 시기가 우리가 빠르니 최초라고 가르치는 건 서양이 아닌 동양이어야 하고 그 동양에서도 한국, 고려라고 해야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지, 금속활자, 금속활자 인쇄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본질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서로 다른 먼 곳에서 각자 발명을 했는데 당시에는 쉽게 왕래가 없고 정보를 알 수 없으니 각자 기준에 맞춰 최초라고 규정했다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는 누가 진짜 최초인지 아니 그 최초라는 것 자체만 고치면 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쿠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과 고려의 인쇄술에 상당 부분 흡사한 점이 있고 전혀 왕래가 없었을 것 같은 유럽과 고려간의 왕래 사실 여부, 동양에서 화약과 나침반 등이 먼저 만들어져 서양에 전파 된 것처럼 여러 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인쇄술 역시 서양에 흘러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 기존에는 독일의 쿠텐베르크가 먼저냐 한국(고려)의 직지가 먼저냐만 따졌지만 그 직지에 쓰인 기술이 쿠텐베르크에게 전해진 경우라면 이야기의 본질이 확 달라진다. 동양의 최초, 서양의 최초 각각이 아니라 서양은 동양의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여 활용만 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쿠텐베르크의 이야기와 역사는 모두 바뀌어야 한다는 아주 큰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쿠텐베르크가 최초는 물론 아예 이걸 만든 것이 아니라 동양(고려)의 것을 보고 따라했다면 세기 1천년의 인물 역대 1위인 쿠텐베르크의 위상 자체가 아예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직지코드는 직지에 대한 탐구 보다는 서양 인쇄술의 아버지인 쿠텐베르크가 동양의 작은 나라 고려라는 곳을 어떤 식으로든 접하게 되고 고려의 인쇄술을 도입해 자기가 서양에 전파하였다는 가설로 출발하는 다큐다. 쿠텐베르크가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스스로 발명했다기 보다는 동양의 인쇄술, 그것도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배워 활용했을 것이라는 걸 가정하여 접근한 다큐로서 여러가지 정황을 추척해 파헤친 영화다. 영화리뷰지만 워낙 담고 있는 내용이 우리에게 중요한 역사 문화재에 대한 이야기면서 가볍게 다룰 내용이 아니라 영화리뷰 형식과는 좀 다른 글쓰기 형태가 될 것 같은데 영화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어 어느정도 이해했으면 좋겠다.

스틸컷을 보면 알겠지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 추적을 위한 고행길을 떠나는 걸 알 수 있다. 여러 박물관, 도서관, 학자, 관계자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고서를 통해 관련 물증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전혀 별개의 발명, 서로 연관성이 없는 각자의 기술이라 생각했던 금속활자 인쇄기술이 만약 별개가 아닌 "서로 연결"된 것이라면 시기적으로 직지가 먼저 만들어졌으니 (증명 되었으니) 쿠텐베르크가 그걸 보고 따라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럼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쿠텐베르크가 고려를 알고 있었는지, 고려는 유럽과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그리고 고려와 유럽간의 문화 교류가 어느정도 가능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서양과 왕래가 없을 것이라 여겼던 고려지만 동양과 서양을 잇는 중심에는 중국이 있었고 중국은 유럽과 왕래가 되었으며 고려는 중국과 왕래가 잦은 나라니 중국을 매개로 하여 잘 살펴보면 뭔가 단서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추적 과정이 전개된다. 즉 고려의 인쇄술이 중국에 충분히 알려질 수 있는 여건에서 중국에 들어온 여러 유럽인들에게 인쇄기술이 노출 되었다면 유럽의 쿠텐베르크가 접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직지, 또는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인쇄기술)에 대해 평소 관심이 없었거나 교과서 등에서만 간단하게 배운 경우, 쿠텐베르크보다 먼저 만들어졌다가 배움의 전부라 이런 기술 교류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고 상상하기 힘들다. 단지 우리가 조금 더 빨리 만들었다로만 인식하지 쿠텐베르크가 우리 인쇄술을 배웠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외로 동일한 주제의 관련 다큐는 영화가 나오기 이전부터 있었다. 영화를 통해 처음 관련 정보와 의구심을 갖게 된 분들에게는 그 자체가 쇼킹하겠지만 예전부터 방송과 신문 등에서 다루었던 적이 있어 해당 다큐를 영화보다 먼저 접한 분들에게는 큰 소득이 없다. 물론 그동안 접하지 못한 다른 부가적인, 새로운 사실들이 몇 가지 있지만 다큐가 말하고자 한 원래 목적과 약간 상이한 것도 있고 파급력 있는 공인된 정보라 할 수 없어 여러가지로 소득이라고 따로 내세울 건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기존의 공중파 다큐는 영화보다 더 짜임새 있고 더 퀄리티 있게 만들어졌지만 지역방송국에서 만든 다큐다보니 전국민이 시청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후 특집방송을 통해 다른 방송이 나왔어도 그것이 알고싶다나 추적60분과 같은 대중적인 방송 프로그램이 아닌 특별 편성 형태라서 파급력을 갖추진 못했다. 직지코드는 방송사의 작품이 아닌 영화로 만들어졌고 또 공중파 전국방송을 통해 심야 방송이었지만 그래도 가장 대중적인 노출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이 내용을 영화로 먼저 봤거나 처음 접했다면 시청자 입장에서 상당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직지코드라는 영화의 제목은 누구나 그러하듯 "다빈치코드"를 연상케 한다. 누가 보더라도 다빈치코드를 염두한 작명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둘 다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상당히 위험한 작명이라 생각되는데 한 쪽은 (다빈치코드) 모티브를 따서 만든 창작물이지만 한 쪽은 (직지코드) 가공된 대사나 창작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제목과 결부지어 다큐를 계속 보게 되면 소설, 드라마처럼 보일 여지가 매우 많다. 그러니까 어떤 부분에서는 음모론이 개입할 부분이 많다는 것이고 사람들 주목을 끄는데는 제목이 꽤 성공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이 정말 완벽한 추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한 풀리지 않는 음모론으로 각색될 확률이 매우 높다.

무엇보다 기존의 방송 다큐와 다른 것이 쓸데없는 양념의 믹스, 조합이다. 직지 또는 금속활자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중심축이 되어야 하는데 영화는 이걸 추적하는 두 남녀가 주인공이다. (아예 주인공1, 주인공2로 소개된다) 다큐로 가되 영화적 요소를 넣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두 인물이 직지와 쿠텐베르크의 연관성을 추적하는 과정 자체를 찍자는 아이디어는 충분히 개연성은 있으나 그건 정말로 "다빈치코드"처럼 만들었을 때나 가능하지 형식은 다빈치코드인데 실제로는 다큐로 찍으면 상당히 부조화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직지와 쿠텐베르크간의 연관성에 대해 이미 자료와 다큐가 있으니 그걸 "모티브"로 삼아 다빈치코드처럼 각색된 하나의 창작물, 상업 영화로 만들어 접근하고 모티브만 따왔지만 객관적인 사실은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을 영화적 요소로 던져 판단은 관객이 알아서 하도록 하면 이것보다 큰 화력이 없을 것 같은데 엉뚱하게 다큐를 다큐로 안 찍고 애매모호하게 찍은게 가장 큰 아쉬움이다.  


어차피 다큐인데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그래픽 동원해서 영상을 더 부각시키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자체가 더 효과적일텐데 엉뚱하게 두 인물이 겪는 고행, 스트레스, 고난, 역경, 인터뷰를 메인으로 삼다보니 후반으로 갈수록 뒷심이 많이 빠지고 이야기의 중심축이 많이 흔들린다. 처음 이런 이야기를 접한 분들의 경우 초반에는 관심도가 매우 높다가 후반으로 가면 맥이 빠졌을 분이 꽤 있을 것이라 보는데 이미 내용을 어느정도 알고 접한 경우라도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보긴 봤는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게 뭔지, 이야기가 남긴 게 뭔지, 그래서 쿠텐베르크가 아이디어를 고려에서 얻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연관성이 없다는 것인가, 갈피를 잡기 힘들다. 도서관이 취재를 방해하고 인터뷰를 거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데 약간 음모론으로 각색이 되면서 실망감을 준 것도 사실, 슬리핑 파트너 (배후세력으로 해석) 부분에서는 영화적인 요소로 너무 접근하려는 의도가 보여 오히려 집중이 안된 것도 있다. 처음부터 영화 시작 전 도서관의 거절 메세지에 포커스를 두고 "거절되는 과정"이 아니라 "거절된 사실"을 근거로 "거절될 것"을 "찍자"라고 시나리오 방향을 잡았다는 것 자체가 본질이 많이 흐려진 걸 말한다. 직지에 대한 탐구가 아닌 이들이 영화 내내 거절 당하고 쫒겨나고 거부 당하는 모습이 주를 이루는 이유가 그래서다.

팩트를 근거로 하는 다큐형식의 탐사보도라면, 그것이 알고싶다나 추적60분의 경우처럼 탐사보도 자체가 중심이지 그 과정이나 과정의 어려움을 메인으로 삼지 않는다. 특정 장면에서 거절되는 장면이나 쫒겨나는 장면이 나올 수 있지만 그걸 주제로 삼는 경우는 없고 실체를 탐구하는데 주력한다. 계속 쫒겨나고 계속 거절되면서 결국 우리는 알아낸 것이 없다! 라고 결론지어 끝낸다면 시청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영화가 그렇다.

상정고금예문 (1234년 금속활자로 발행), 무엇보다 이 사실만 하더라도 직지보다 138년 빠른 인쇄물이 있었으니 직지가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이 아니고 백운화상 역시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직지는 저자가 백운화상이 맞긴 하지만 직지 역시 백운화상이 중국(원나라)에 있을 때 청공선사에게 받은 책이다. 그 책을 증보 (더할 내용이 있음 더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우는 것) 하여 초록 (필요한 것만 따로 떼어 기록) 하였다고 나오는데 그게 지금의 직지다. 

중국의 직지심체요절에서 초록하여 증보한 것이 백운화상의 직지인데 금속활자본의 직지는 백운화상이 입적하고 난 3년 뒤 (사후) 그가 남긴 직지를 가지고 청주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백운화상은 자신의 직지가 금속활자로로 인쇄되어 나온 것을 보지 못했다. 백운화상 자신이 금속활자 인쇄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획기적인 발명이 나오면 우리는 그 발명품과 함께 발명가를 먼저 꼽는다. 에디슨처럼 말이다. 그래서 서양은 직접 인쇄기술을 선보인 쿠텐베르크라는 인물이 인쇄 발명의 중심이다. 반면 우리는 인물이 해당 금속활자에 직접 관여한 건 아니고 그 분의 책이 금속활자본에 쓰였기에 인쇄물인 직지가 중심이다. 발명품은 있으나 발명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138년 이전에도 금속활자로 만든 인쇄물이 있었다는 사실로 고려 인쇄술이 직지 출간 훨씬 이전부터 성행은 아니어도 어느정도 자리는 잡았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결국 고려의 인쇄술이라는 틀이 아닌 직지라는 발명품의 부산물에 포커스를 두고 접근하면 한계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직지 연대기가 고려 인쇄술의 시작점, 혹은 최정점, 성행하던 시기처럼 착각하게 될 소지가 있고 그 연대기에 맞춰 유럽의 기록물을 찾아 볼게 될 수 밖에 없다. 서양이 쿠텐베르크에 대해 확고한 믿음이 있는 건 쿠텐베르크라는 인물에 대한 것이 확인되면 그가 만든 것 (인쇄기), 그리고 그걸로 나온 결과물 (책) 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조금 더 검증할 수 있는 단계가 되지만 직지를 중심으로 두면 쿠텐베르크와 같은 인쇄기술자(발명가)에 대한 부분과 인쇄기에 대한 역탐색을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고 밝혀진 것이 아예 없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인쇄기라는 장치 여부) 출판했는지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서양의 쿠텐베르크에 밀릴 수 밖에 없는 건 사실.

한 남자가 탐구하는 과정을 그리기 위한 시나리오라는 건 영화적 요소라 어느정도 감내할 수 있지만 상황적 묘사와 극적인 장면 전개를 위해 또 하나의 인물을 투입해 구도 삼는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영화 속 내용과 전혀 맞지 않고 상당히 불필요하다. (처음에 여자 주인공이 들어가게 된 것도 다빈치코드 영화 여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제작자 말이 있다) 무엇보다 본질과 다른 제작진들의 고생담, 개인 생각, 음모론에 가까운 추측, 도난 사고 등이 상당 부분 소재의 전부를 차지하면서 "영화 김광석"을 봤더니 김광석 이야기는 별로 없고 만든 이상호 기자 고생담이 전부더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적인 요소를 감안하고 봤어도 10점 만점에 6점, 수우미양가에서 "양"으로 소재의 참신성과 진실을 탐구하고 추적하는 그 노고는 이해하나 본질이 상당히 많이 흐려진 안습 영화라 평가하고 싶다. MBC 다큐의 상당 부분을 참고하고 만든 영화 같은데 제목처럼 다빈치코드와 같은 형식으로 제대로 만들었다면 몰라도 너무 다큐에 치중해 현실에 주안점을 두면서 스스로 한계성을 가졌고 그 현실의 한계점을 영화적 요소로 어떻게 하려다보니 미처 버무려지지 않은 만들다 중간에 멈춘 요리처럼 아쉬움이 더 크다.


제작비 4억 5천, 이 중에서 2억은 직지를 홍보하는 충청도와 청주시의 도움으로 제작 되었다고 하는데 직지와 관련한 일반 방송사 다큐 제작비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고 무엇보다 방송사 다큐가 훨씬 더 잘 만들어진 점을 생각해 보면 도서관 관계자와 학자들을 만나 인터뷰 하는게 사실상 전부인 영화에서 왜 이렇게 돈을 많이 썼는지도 이해가 살짝 안된다. 돈이 왜 중요하냐면 영화 마지막에 영화가 더 추가적인 확인 작업과 검증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 밝히는데 그 이유가 "제작비" 때문이라는 걸 대놓고 영화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5개국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다보니 돈이 많이 들었다라고 하고 싶겠지만 그럴 것 같으면 여주, 남주를 빼야 했고 나레이션으로도 충분함에도 굳이 여러 사람이 이동하게 시나리오를 짜면서 직지나 인쇄술보다 그 제작하는 "사람"들을 영화의 주요 줄거리로 삼다보니 돈이 부족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인데 이게 영화 스스로가 말하는 결말이라는게 약간은 황당하다.

대구MBC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 쿠텐베르크, 고려를 훔치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2014년 제작, 방영 되었다. 그것이 알고싶다의 전 진행자 문성근씨가 직접 출연하여 나레이션을 하는 다큐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상당히 몰입감 있고 흡입력이 강하다, 그것이 알고싶다 포맷에 익숙하다면 정말 진실을 탐구하는 다큐이면서 추적 과정에 상당히 과학적이고 실험적이다. 말로 푸는 것이 아니라 증명하려 노력한다. (유튜브 등에서 해당 제목을 찾으면 아직 볼 수 있다)

영화에도 나오는 엘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발언도 역시 똑같이 볼 수 있다. 엘 고어 인물에 중심을 두면 상당히 신빙성 있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볼 수 있지만 그가 선 자리가 2005년 서울디지털포럼이고 우리나라를 찾아 한 발언이기 때문에 립서비스에 가깝다고 봐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이 내용은 정확하지 않는 여러 사람의 구술 전달로 빚은 해프닝으로 보는게 맞을 것 같다.

2001년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역사는 쿠텐베르크에게 너무 관대하였는가" 라는 미국 프리스턴대학 연구팀의 연구결과 보도문 역시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룬다. 2000년에 MBC 다큐 "금속활자, 위대한 발명" 2003년에는 MBC 다큐 "세계사를 바꾼 금속활자, 그 원류를 찾아서" 등의 다큐가 추가로 만들어 진다.

2008년에는 오세영 작가가 쓴 소설 "쿠텐베르크의 조선"이라는 책이 출판된다. 교황청의 기록과 엘 고어 부통령의 발언을 토대로 모티브를 얻어 쓴 소설이다. 쿠텐베르크와 추기경이 신원 불명의 사람의 교황에게 소개했고 42행 성서가 잘 마무리 되었다는 교황청의 기록물을 근거로 하여 각색한 소설이다. 직지코드 영화에서도 교황청의 기록물 접근 과정에서 다룬다.

2010년 2월 21일 신비한TV 서프라이즈 방송에서도 같은 소재를 다루었다. 영화 속 내용과 거의 같다. 그 외 MBC 다큐 "고려인 문명을 새기다 (1부, 2부) 등에서도 쿠텐베르크의 연관성은 다루지 않지만 쿠텐베르크 보다 앞선 고려 인쇄술에 대한 종주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금속활자 인쇄기술 자체를 접근한 다큐도 있다. 

열거한 위 영상 매체나 기사만 보더라도 사실 이 영화의 내용 99% 다 봤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나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약간 빈약하다. 심지어 MBC 다큐 등에서는 영화와 달리 직지 원본이 공개되고 촬영된다. 물론 똑같이 원본 훼손과 여러가지 이유로 원본 공개가 거절되지만 결국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협조로 찍는데 성공한다.

방송이 아닌 영화로서 다시 만들었다에 의미를 둔다면 나름 이것도 의미겠지만 내용이 크게 다른 것도 아니고 완성도는 오히려 떨어지는 측면이 많고 직지나 인쇄술 보다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는게 더 많아 만약 직지나 쿠텐베르크의 연관성에 대해 꼭 알아야 한다면 이 영화 보다는 위에 나온 MBC 다큐를 무조건 먼저 보고 참고하라고 하고 싶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만들 때 힘들고 고생했다는 제작진의 푸념 보다는 담고자 하는 그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일한 차이이자 나름의 수확이라 할 수 있는 교황이 고려 왕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는 부분, 그리고 교황청에서 실제로 그게 있다라고 알려주고 편지 내용을 공개한 부분은 획기적이면서 놀라운 장면이지만 고개가 살짝 갸웃거리는 것도 사실이다. 정말로 이게 100% 입증이 되었다면 (편지 내용도 있으니) 파급력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아시다시피 우리는 그 파급력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했다. 교황이 조선의 왕도 아닌 고려의 왕에게 직접 편지를 썼고 그게 남아 있다는데 (필사본) 왜 우린 모르고 있던 것일까...

영화는 자막으로 교황이 말한 그 곳이라 해석한 것을 고려라고 받아 들였다. 교황은 편지에 그 곳이라 했지만 영화는 괄호를 열어 그 곳 (고려) - 그 곳이 고려라고 우리에게 설명한다. 정확하게 "고려"라고 쓰였거나 고려라는 정황이 있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은 부족하다. 제작진을 돕는 정보원이 교황이 "고려"에게 쓴 편지가 있다고 말을 했고 사실 그게 전부다, 교황청에 문의 했을 때 교황청에서 맞다라고 하니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그 교황청에서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찾았는지를 보면 그 편지가 남겨져 있다는 문서 목록을 정보원들이 알려준 걸로 나온다. 정보원이 제작진과 교황청 양쪽에게 알려준 셈인데 교황청은 그걸 보여주면서 고려라고 특정 짓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정보원의 자의적인 해석이 낳은 결과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니 학계에서 높은 관심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견해가 더 많았고 서울대 교수가 논문을 통해 문법 체계와 당시 지리적 환경을 볼 때 고려 왕에게 쓴 편지라고 볼 수 없다라고 발표하면서 영화가 그나마 기존의 다큐와 다른 유일한 성과였던 교황의 편지는 별거 아닌 걸로 보인다. 편지의 실체가 설령 맞더라도 그 곳의 행방은 고려가 아닌 다른 나라, 동아시아의 다른 어떤 나라를 지칭하였던 걸로 보인다. 애초에 우리가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환대하고 잘 대해주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 신뢰성이 크진 않았다.

영화에서 던지는 메세지보다 더 알차다고 평가하는 MBC 다큐 영상을 찾아 올려둔다. 보고 싶은 사람은 두 다큐를 먼저 보고 영화를 보면 더 빨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https://youtu.be/64oOWulZDDM (고려인 문명을 새기다 MBC 다큐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6V9spjNV8sY (쿠텐베르크, 고려를 훔치다 MBC 다큐 유튜브 영상)

영화와 별개로 직지와 금속활자 이야기에 대해 나름 정리를 해본다. 영화가 갖는 의미, 그동안 이전의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서양의 쿠텐베르크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쇄술에 대한 정의는 누가 어떤 시각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분명 달라질 수 있다. 

금속활자의 인쇄방법과 기술에 대한 문명 발상지가 어디냐로 보는 것과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는 누가 먼저 어디서 먼저 시작했느냐는 다르다.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시작했다고 해도 그 과정과 발전 과정을 비교해야 하는 측면도 상당히 크다. 우리가 먼저 시작했고 먼저 가졌음에도 우리가 인쇄술을 발달 시킨 건 자력이 아닌 외력, 서양의 기술 도입 덕분이다. 서양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에 의해 우리는 근대 인쇄기술을 가졌다. 그 이전까지 금속활자, 철판인쇄든 목판인쇄든 발전 시키지 못했다. 이건 분명히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가 금속활자라는 아이디어와 활자 제작 방식 자체는 우리가 앞섰다고 해도 그 활자를 응용해 대량으로 찍어내는 과정, 즉 인쇄기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인쇄기라는게 없다. 인쇄하는 방법에서 활자를 사람이 일일이 "찍어"낸다는 점에서는 인쇄가 성립 되지만 사람이 찍는 것과 기계가 찍는 건 천지차이, 우리는 인쇄기술과 인쇄자가 있지만 인쇄기라는 기계 장치가 따로 있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인쇄하는 걸 보면 나무판에 하나씩 활자를 배열해 문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먹을 칠해 종이를 눌러 찍혀 나오게 한다. 종이를 깔고 목판을 눌러 찍는게 아니라 목판을 깔고 위에 종이를 덮어 묻어 나오게 하는 방식으로 근본적인 방법이 다르다. 서양은 대중적인 책 발행에 썼고 우리는 귀족이나 양반 등, 또는 궁에서의 자료 만들 때만 썼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사실 어느 일부분이지 그 때문에 전부 발달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없다. 인쇄 기술 자체가 인쇄 방법에 있어 여러가지 요소가 부합되야 하기에 무조건 글을 쓰지 않고 찍어낸다는 점만 놓고 보면 비슷해 보여도 그 결과물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찍는 과정의 효율을 따질 수 밖에 없다.

먹과 벼루, 붓으로 글을 쓰는게 전부였던 우리보다 서양은 일찍이 펜(촉)과 잉크가 발달 되었다. 종이 역시 동양에서 발달 했지만 꽃을 피운 건 서양이다. 한지는 사실 인쇄에 적절하지 않다. 한지에 쓰일 먹물 역시 인쇄에 적합하지 않다. 사람이 조절해서 직접 글을 쓰지 않는 이상 장치를 이용해 찍는 과정에서 글자가 먹물에 의해 번지기 쉽다. 제대로 안 찍히거나 너무 찍히거나 등의 문제가 많이 생긴다.

다큐와 영화에도 나오지만 서양은 프레스, 특히 와인을 짜는 과즙기 형태의 프레스가 일찍이 과수원과 수도원 등에 의해 발달했다고 나온다. 프레스와 잉크, 잉크에 맞는 종이가 만나면 인쇄기로의 발전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 금속활자 자체는 동양, 그것도 고려가 먼저 빨랐고 먼저 발명했다고 해도 그걸 활용한 인쇄술, 인쇄기는 서양이 더 빨랐고 먼저 발명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일찍이 고려 때부터 금속활자 인쇄 기술이 있었음에도 인쇄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건 결국 그에 맞는 인쇄기 자체가 없었고 인쇄기 역할을 여전히 사람이 했기 때문이다. 같은 내용을 계속 써야 하는 불편함을 없앤 것은 맞지만 결국 그 글을 계속 똑같이 찍어내는 건 기계가(프레스) 아닌 사람이었다는게 우리나라 인쇄술의 문제다.


철판인쇄(금속활자)냐 목판인쇄냐 흙판인쇄냐의 차이는 따지고 보면 의미가 없다. 사용 소재의 차이일 뿐이고 현대는 철판인쇄가 핵심이니 철판을 누가 먼저 썼느냐가 인쇄의 사실상 시초라 할 수 있는데 금형, 직접 글을 쓰지 않고 글자/문자를 미리 만들어 활자로 만든다는 건 목판이나 흙판이나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기술이라 금속활자가 갖는 상징보다 금속활자가 얼마나 많이 쓰이고 대중적으로 도움이 되었는지를 봐야 한다. 금속활자가 목판이나 흙판보다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금속활자가 없으면 인쇄가 안되는 건 아니고 목판으로도 대량 출판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기에 본질이 다르다. 금속활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된다가 아니라 없어도 된다는 다르다. 금속활자가 있어도 인쇄기가 없으면 무용지물로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비슷하지만 제대로 된 인쇄기만 있으면 활자는 인쇄기의 부속품일 뿐 인쇄기보다 중요할 수 없다. 

쿠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발명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금속활자를 가지고 만든 "인쇄기"는 처음 만든 건 누가봐도 사실이다. 모든 인쇄공들이 그의 고향을 찾았고 그의 인쇄기술을 배워 갔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속활자 제작 및 사용 기술이 있었지만 수백년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인쇄기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걸 만든 사람이 없다. 일일이 활자에 먹물을 칠해 복사를 한 것이 전부, 글쟁이는 필요없고 먹물을 바르고 종이르 대고 찍어내는 작업자만 있으면 되었기에 사람이 기계 역할을 대신 했는데 유통량이 많지 않으니 그 수준에서 만족한 것이 사실, 반대로 서양은 대륙에서 많은 책의 유통이 가능하다보니 더 확실한 인쇄기가 필요했는데 그걸 실현 가능하게 한 것은 활자보다 더 중요한 업적으로 보아야 한다. 

자동차의 핵심 부품은 의외로 "고무" 바퀴다. 바퀴가 없는 자동차는 없다. 굴러가는 바퀴야 있어야 자동차가 움직이고 움직여야 자동차다. 제 아무리 좋은 차량도 바퀴가 없으면 그냥 기계다. 고려가 고무 바퀴를 먼저 만들었다고 해서 자동차의 원조 국가가 될 수 없다. 누군가 자동차의 원형을 만들고 고무 바퀴를 나중에 썼다고 해도 자동차를 만든 것과 바퀴를 만든 건 개념이 다르다. 자동차(인쇄술)에 기준을 두면 바퀴 발명보다 자동차 전체 발명이 더 큰 것도 사실, 왜냐면 자동차라는게 고무 바퀴가 없다면 쓸모 없다고 생각하지만 자동차보다 먼저 나온게 "기차"다. 기차는 고무 바퀴가 필요 없다. 목판, 흙판처럼 다른 재질로도 활자가 가능한 것처럼 바퀴도 꼭 고무만 있는 건 아니다. 시내에서 트램과 같은 전차를 쓰는 건 지금도 흔하다. 고무가 없었더라도 그 외 나머지 자동차 기술이 있다면 얼마든지 트램, 전철, 고속철 등으로 저속부터 초고속까지 만들 수 있다. 

그런 이치에서 봐야 한다. 구텐베르크가 없었으면 정보 교류와 책의 발달에 상당한 지장을 받았을 것이라는 그 점은 그래서 상당히 중요하다. 대부분의 문명이 지금처럼 발달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도 그래서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고 사용했어도 우리나라조차 책 문화에 큰 기여를 못한 것만 보더라도 인쇄기를 발명한 것과 인쇄기의 활자를 발명한 건 차이가 매우 크다. 우린 활자를 가졌음에도 인쇄기를 못 만들었고 서양은 인쇄기를 만들었다는게 중요하다. 쿠텐베르크가 금속활자, 고려의 금속활자와 어떤 연관성이 있든, 결국 그의 업적은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연관성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자부심이 생기고 서양에서도 조금 더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인쇄 문화와 교육이 되는 것이라 연관성이 정말 있다면 심층적으로 연구해 밝히는게 맞다. 직지에 대한 설명에서도 썼지만 직지를 초록하고 증보한 분은 백운화상이다. 그 분이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은 "원나라"였다. 백운화상이 주지로 있던 절은 노국공주와 연관이 있고 노국공주는 아시다시피 원나라 공주다. 베이르 테무르의 딸로 우리에게는 원나라 공주지만 시집 온 고려를 위해 원과 대적한 인물로 많은 드라마에서 인기 있는 캐릭터로 그려지기도 한다. 직지의 저자 백운화상이 큰 스님으로 대접 받던 시절은 공민왕, 공민왕의 아버지는 충숙왕, 할아버지는 충선왕이다. 충렬왕 이후 충선왕부터 몽골이름으로 된 휘를 쓴다는 건 고려왕 계보에서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공민왕의 증조부인 충렬왕은 제국공주와 결혼해 충선왕을 낳는데 제국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딸이다. 쿠빌라이는 바로 칭키스칸의 친손자다. 몽골 칭키스칸의 손자가 낳은 딸이 충렬왕과 결혼해 낳은 자식들이 고려의 후기 왕들이고 그 시기에 직지와 백운화상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려는 몽골과 아주 밀접한 관계라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와 다큐에서도 중국이 서양의 인쇄술에 있어 매개체 역할을 하고 교황청의 사제들이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인쇄술에 쓰인 금속활자를 습득하였을 것이라 보는데 원나라가 아닌 중국으로 접근하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를 보면 고려인들이 당시 원나라에도 있었기에 충분히 연관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동양의 관계, 특히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서 원나라와 고려만을 떼어 생각하면 서양인들이 생각지 못한 관계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고려와 당시 중국인 원나라의 관계와 문화, 교류 사실을 먼저 정확하게 보여주고 원나라에서 충분히 고려 기술과 문화가 전파될 수 있음을 인지시킨다면 중국과 유럽간의 문화교류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완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보다 정확한 금속활자 전파 유래설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영화리뷰로 시작했지만 직지와 금속활자는 다큐처럼 할 말도 많고 아직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다. 모리스 쿠랑 이야기도 빠져서는 안되고 콜랭 드 플랑시도 빠질 수 없다. 박병선 박사와 병인양요, 외규장각, 외규장각 의궤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문화재 반환이라는 큰 문제까지 이어진다. 콜랭 드 플랑시가 마치 우리 문화재를 약탈 한 것처럼 알고 있는 분도 있고 모리스 쿠랑이 박병선 박사에 묻혀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며 박병선 박사의 공적도 물론 있지만 혼자가 모두 다 한 것처럼 비춰지는 것 역시 다르게 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마치 사명감을 갖고 처음부터 외규장각 의궤와 직지를 찾은 것처럼 되어 있지만 직지 발견과 검증 과정의 모든 관계자 인터뷰와 박병선 박사 본인의 인터뷰를 다 찾아보면 생각보다 많은 인물들의 도움이 있었고 또 그게 굉장히 컸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의궤는 영구임대 방식으로 반환이 되었지만 직지는 끝까지 프랑스가 반환하지 않는 이유, 영화처럼 공개를 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는 까다로운 그들의 입장에 대해서도 이번 영화와 다큐를 계기로 조금 더 깊게 알았으면 좋겠다. 추후 직지 관련 및 주요 인물들의 역할, 여기서 미처 다 하지 못한 다른 이야기는 따로 시간내어 정리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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