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과 말에 대한 표현 중에 한국 사람은 끝을 봐야 제대로 알 수 있고 말도 끝까지 들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라는 표현이 있다. 어중이 떠중이 중간 중간 건너 뜀으로 보거나 요약해서 대충 해석하면 제대로 된 진심을 알지 못할 때가 많기에 그런 말이 가끔 등장한다. 항간에는 이런 것이 한반도 역사에서 항상 있었던 물리적 전쟁이나 이념에 따라 갈리는 사상 논쟁으로 피해를 자주 경험하다보니 속내를 잘 내비치치 않는다하여 우리만의 특징이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솔직, 직설 보다는 적당히 방어적인 입장에서 간접적인 의견 표시를 하는 일이 더 많기에 틀린 말은 아닌 듯 싶다. 맛집 평가도 거의 첫 방문 한방으로 결정을 하고 리뷰를 하고 맛이 있다 없다를 결정하지만 최소한 맛집 평가는 시간대를 달리해서 세 번 이상은 방문해야 제대로 된 평가물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람도 첫만남이 아닌 여러 만남을 통해서 진가를 알아내는 것처럼 단편적인 일회성 정보만 가지고 판단할 때는 항상 생각지 못한 위험이나 오판이 생긴다,
영화 "침묵"도 마찬가지다. 시간 나열대로 진행되는 과정을 하나씩 보여주지만 영상에서 보여주는 장면이 모든 걸 대변할 수는 없다. 물론 의도된 장면 배치이고 또 건너 뜀을 활용해 핵심 내용은 빼고 겉의 포장만 열심히 보여주다 보니 이것이 나중에는 나름의 반전 요소가 될 수 있다. 알짜는 숨기고 포장지로만으로 영화 상당 부분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제목이 침묵이라 진짜라고 할 수 있는 진실은 침묵으로 일관되고 정작 우리가 아는 대부분은 그 침묵을 유지하기 위한 속임수이자 포장지에 불과하다보니 그냥 입을 닫는다는 차원을 넘어 아예 저 멀리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묻어버린다의 수준인지라 어디에 기준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 관객 평가는 극명하게 달라질 것 같다. 뻔한 결과와 뻔한 스토리, 누가 범인이고 누가 나쁜 사람이고 누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쉬운 예상 구도를 일부로 선택 했는데 예상했던 결과대로 흘러가도 찜찜하고 예상과 달랐어도 찜찜한 구석이 많을 스토리라서 최고와 최악이라는 둘 중의 하나의 평가 보다는 오히려 그저 그런 영화라는 자칫 쉽게 잊혀질 수도 있는 평범한 자리에서 관객들에게 오랜 시간 기억되거나 침묵처럼 그냥 묻혀지거나 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 없이 딸 하나만 둔 재벌 총수 (최민식), 그는 세상이 돈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있고 돈이면 해결 못하는게 없다는 사고 방식을 가진 남자다, 딸이 성인이 될 무렵 그에게는 여자가 생긴다(이하늬). 돈 밖에 모르는 남자, 생각없이 사는 듯한 딸, 그리고 연예인이라고 하지만 엄마와 딸 보다는 언니, 동생의 자매라고 하는게 더 나을 정도로 나이 차이 많은 남자를 택한 약혼녀, 이 세 사람이 관계가 형성되면서 영화는 뻔한 스토리를 시작한다. 막장 드라마 소재로서도 너무 흔한 아이템, 화려한 연예계에 몸 담고 있으면서 나이 많은 재벌 회장과 결혼을 하려고 하는 언니뻘 되는 새엄마는 어떤 인물일지 예상이 되고 하루 신은 하이힐은 다시는 신지 않는다는 딸에 대한 아비의 단 한마디로 딸년이 어떤 인물인지 역시 예상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돈돈 하는 재벌그룹 총수의 모습 역시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세 사람의 조합은 언젠가 뭐가 터져도 터지게 되어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약혼녀가 예전에 사귀던 남자친구와 만들었던 동영상(우동) 하나가 인터넷에 공개되고 딸은 그걸 보게 된다. 그리고 아빠의 약혼녀에게 문자를 보내 만나자고 연락하게 되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 사건은 그날 결국 터진다. 갑작스러운 약혼녀의 죽음, 그리고 그 현장에 있었던 걸로 추정되는 딸, 아버지는 사랑하는 약혼녀를 잃었다는 슬픔을 간직하기도 전에 딸이 살인자로 몰리는 과정 역시 지켜봐야 했다, 돈이면 다 된다는 그는 결국 딸의 무죄를 위해 나서는데....
영화는 그렇게 법정영화 스토리를 갖추며 진실게임을 한다. 약혼녀를 죽인 범인은 진짜 누구고 딸이 그 범인인지 아닌지 알아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이 이제 시작된다. 술이 떡이 되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딸에게 진실을 요구하지만 딸은 기억이 안난다로 일관하고 아버지는 최고의 로펌을 선임해 딸을 방어하는데 주력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말이다.
아버지는 말한다, 딸은 자기 돈을 빼먹기 바쁘다고, 그런 자식이지만 차가운 철창 속에 수감된 딸을 보며 그는 딸을 지키려 노력한다. 물론 딸의 무죄를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약혼녀 죽음에 대한 진실이기도 하지만 딸이 만약 진범이 맞다면 그는 딸을 위해 약혼녀를 희생시켜야 하고 반대로 약혼녀를 위해 진실을 구하면 딸이 위험할 수 밖에 없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게 된다. 점 하나로 남과 님이 되는 약혼녀는 이미 죽은 사람, 상황만 보면 당연히 아버지는 딸이 마음에 들든 말든 상관없이 핏줄로 이어진 딸을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영화는 그런 뻔한 구도를 그린다.
영화는 몇 가지 혼선을 일부로 준다. 물론 잘 짜여진 구도라면 흥미로운 부분이지만 사실 아쉬움이 더 많다. 화려한 페이크가 많은게 신선하기는 하지만 포장하는 기술의 한계성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 결말이 되어서야 어느정도 실마리가 풀리기는 해도 중간 중간 넘어가고 보여주지 않는 장면들의 숨겨진 진실을 너무 감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감성적인 부분, 캐릭터들이 갖는 감정들의 변화와 무게감을 너무 깊게 다루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다. 아마 이런 결과가 관객들에게도 잘 어필이 되지 않은 듯 한데 조금 더 다듬고 조금 더 각색을 했다면 좋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은 이 영화가 존재하는 한 영원할 것 같다.
아버지는 딸을 위해 최고의 로펌을 선임했으면서도 갑작스럽게 담당 변호사를 바꾼다, 단지 딸의 예전 과외 선생님 출신이었다는 이유 외에는 변호사로서의 능력이나 자질, 성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선택이었는데 누가봐도 오판적인 상황일 수 밖에 없다. 단지 영화의 재미나 스토리를 위해 특정 변호사(박신혜)를 투입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결말에 나온 아버지의 생각과 변화 과정을 보면 이것마저도 계획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로펌이 아닌 친분이 있다는 이유 만으로 개인 변호사를 쓴 것 자체가 아버지의 모든 계획이었다면, 그리고 그걸 드러낼 수 있었다면 영화의 평점은 조금 더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중간에 관객을 속이기 위한 여러 페이크 작전들이 있다보니 묻히기 쉬운 전략이기는 했다. 딸에서 약혼녀의 매니저이자 자신의 비서로 진범이 바뀌고 다시 그 사람에게서 아버지가 범인일 수 있다라는 뻔한 예상 시나리오가 전개되는데 이런 뻔한 이야기를 뒷통수 칠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신의 한 수가 될 수는 있지만 변호사 관련 장면이 본래의 이야기와 너무 동떨어지고 또 비중이 많아 약간은 전략적인 시나리오가 희석된 부분도 보인다.
누가봐도 처음부터 끝까지, 시작과 끝 역시 아버지, 약혼녀, 딸 세 사람의 이야기가 핵심이고 줄거리고 영화의 전체이자 주인공들인데 중간은 주인공이 변호사를 포함해 넷이 되면서 혼란을 자초했고 누가 핵심인물인지 누가 주인공인지 관객을 착각하게 유도했다기 보다는 재미를 떨어트린 요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법정이 등장하는 장면 이후로는 박신혜가 거의 나오지 않는데 결국 극 전개나 스토리 상황 자체가 주인공은 셋이 될 수 밖에 없다보니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더 키웠어야 하는데 정작 과외 선생님의 이야기가 더 커지면서 흥행적인 요소는 많이 놓쳤다고 봐야 한다.
사고(사건) 장면이 녹화된 CCTV 영상과 녹화실은 갑작스러운 화재로 모두 사라지고 개별적으로 녹화 된 영상들을 아버지가 찾아 없애려고 하는 것 자체가 딸이 진범이라고 말한다, 약혼녀의 전 남친과의 영상(우동)이 사건을 일으키게 된 이유로 보이기에 딸이 아니어도 아버지 역시 약혼녀를 해할 목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설마"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어쩌면 당연한 것일수도) 아버지가 아무리 돈 밖에 모른다지만 자기가 죽여놓고 딸에게 뒤집어 씌울까 하는 최소한의 양심 가이드가 있다보니 관객들은 아버지는 의심을 해도 결국 범인은 딸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감추려고 하고 있고 뒤집어서 묻으려고 하는 세상에는 자기 밖에 없고 돈 밖에 없다는 아버지가 딸에게 뒤집어 씌우는 건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해본다면 역시 아버지는 범인이 될 수 없는 셈이다. (그러나 그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반전을 이끌어 냈다는 건 굉장히 훌륭하고 또 놀랍다) 가족이라서 그럴 수 없다라는 고정 관념을 그대로 이용해 가족이라면 그럴 수 있다라는 걸 다시 이용했다는 점인데 이걸 보여주기 위해 앞에서 그렇게 돌고 돌아 어렵게 왔다는 점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남긴 평점이라 할 수 있겠다, 멋있게 깔끔하게 뒷통수 제대로 치면 돌아 왔다면 좋았겠지만 너무 돌았고 너무 복잡하게 꽜고 너무 지루했다. 그게 이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
영화와 별개로 썩 내키지 않던 장면은 역시 딸이 법정에서 보인 행동, 짙은 화장으로 재벌 2세의 망나니 모습을 잠깐 보인 건 둘째치고 법정에서 엉엉 우는 것이나 기억이 없다로 모르쇠 하는 건 꼴불견 그 자체, 남녀를 떠나 이런 중대한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자가 저렇게 감성팔이를 해도 되나 싶기도 한데 자연스러운 딸의 모습을 그리기 위함이라고 해도 법정에서조차 남녀의 입장을 표현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여자가 우는 모습이 제일 무섭고 강력하다고 하는데 다행히 판사가 같은 여자라서 그런가보다 했지 솔직히 영화와 상관없이 객관적인 법정 상황만 봤을 때 저렇게 울 정도면 대부분 남자들로 구성된 저 상황에서 감정에 휘말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거다.
약혼녀의 매니저이자 재벌 총수의 비서, 생김새 자체가 내가 범인이고 회장이 시켰다는 뉘앙스를 풀풀 풍긴다
다음영화 기준 일반인 평점 7점대, 전문가 평점 5점대로 평타 수준을 기록했다. 반응도 제각각인데 사실 마지막 결론이 약간의 반전도 있고 또 예상과 달리 각 주인공들의 내면과 실제를 알게 되는 과정, 아버지라는 사람이 마치 스쿠르지 할배의 여행의 일깨움 과정처럼 법정 싸움 자체가 아버지의 변화였고 딸 역시 개과천선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바뀌는 모습, 무엇보다 약혼녀라는 여자가 그렇게 막장에서 흔히 보는 돈 노린 꽃뱀녀가 아니라 순수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아름다운 관계였다는 점에서 평점을 끌어올린 나름의 기폭제가 아니었나 싶다.
후반부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할 타임, 변호사와 딸이 해외로 나갈 때만 해도 이 영화는 망작이다라고 평가를 이미 마음속에 정했는데 해외 장면이 나오면서 그 모든 걸 다 부셔버리고 한방에 뒤집어 버리는 걸 보며, 침묵의 힘, 사실을 위해 진실은 감추는 현실, 연인과의 사랑과 부모 자식간의 사랑의 줄타기를 보는 감정 후폭풍의 결말은 망작의 평가는 그냥 쓰나미처럼 밀어버리고 씁쓸하고 아픈 상처만 훅 던져준다. 초중, 후반까지 모두 만족스럽지 않은 장면들의 연출이었지만 결말의 나름 반전이 그 부족분을 충족시켜준 것은 분명하기에 나 역시 10점 만점에 7점, 수우미양가에서 "미"로 평가하고 싶다.
영화의 핵심 키워드를 가진 CCTV 기사이자 약혼녀의 사생팬, 몰래 찍은 동영상이 사건을 풀 수 있는 핵심자료지만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모든 주인공의 실체가 보여준 현실과 달랐다는 점에서 이 인물도 예외는 아닌데 사실상 변호사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이었고 또 핵심적인 캐릭터라서 감독이 보여준 걸 다 믿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감독이 의도한 연출을 벗어났다면 이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 아버지의 한 마디에 흔들리는 모습이 굉장히 이분법적으로 보이는데 속이는 자와(아버지) 속는 자의(CCTV 기사) 구도가 감독의 연출이라면 숨겨진 침묵과 진실은 "진심"이었기에 아버지와 기사의 만남은 꽤 중요하다.
사실, 현실, 진실, 행실, 과실
행실이 나쁘면 결국 댓가를 치루고 현실을 부정하면 과실을 쉽게 만든다. 진실을 위해 사실을 숨길 때도 있지만 사실을 위해 진실을 숨길 때도 많다. 영화는 그걸 포장했고 그걸 이야기 한다. 뜻하지 않은 깨달음이라면, 역시 남자든 여자든 애인 사이라고 해도 우동 같은 영상은 찍거나 보관하는게 아니라는 걸 새삼 알려준다. 당시에는 추억이 될 수 있어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삶을 파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기에 아무리 추억을 담았다해도 남에게 공개하기 힘든 지극히 개인적인 잠자리 영상은 남기지 않는게 현명할 것이다. (이게 영화에서도 사건의 시발점)
희생당한 피해자와 의도는 없었다고 해도 사람을 죽인 범인, 그리고 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낀 사람 모두가 "가족"이라는 한 울타리였고 제3자, 혹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게 한 편으로는 다행이 될 수 있다. 피해자가 가족 밖의 전혀 다른 엉뚱한 사람이라면 이들의 행위 모두가 용납될 수 없거나 아름다운 결말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족 안에서 벌어진 일이고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고 피해자 이면서 가해자가 된 이중구도라 내면의 파괴는 어쩔 수 없다. 법정에서 이겨도 쓸쓸함이 크고 법정에서 져도 잃을 게 없는, 아버지라는 이름과 남자친구(혹은 남편)라는 이름이 주는 관계에서 어떤 사랑이 중요한지는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둘 다 소중할 뿐이다. 물론 아무래도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더 중하겠지만..남녀 사랑이 있어야 부모 자식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는 걸 보면 답은 없는 것 같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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