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래가 없는 육형제 독립운동 - 세계에 유래없는 한국 최고 명문가로 세계적으로 형제 6명 모두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유래가 없는 일로 전재산 600억(당시 40만원)을 순전히 독립운동하는데에만 바쳐,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한 독립운동 명문가문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중국땅에서 객사하거나 행방불명으로 우리가 익히 아는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느낄 수 있게 그 현실을 제대로 보여준 가문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서 최고의 벼슬을 한 집안 - 영의정 9명 배출, 오성과한음 주인공 이항복의 후손, 천년동안 양반인 집안.일본이 조선 양반들에게 타협하는 대신 주는 귀족지위와 수십억의 돈을 거절한 집안 - 대부분 양반들 일제에 타협.
급하게 처분했어도 600~800억원(현재가치)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6형제가 모두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 - 식솔60여명이 이동, 신분 해방된 노비들 일부도 주인들을 따라감.
*신흥무관학교 설립 , 공짜로 먹이고 가르쳐 수천명 독립군 배출 - 이밖에도 헤이그밀사 파견지원, 고종황제 중국망명계획등 독립활동.
이회영선생의 집에 시집온 명문가 규수들이 삯바느질과 고생을 많이해서 반지가 안 들어갈 정도. - 육형제 모두 강냉이와 풀죽으로 연명
단군이래 가장 덕망있는 집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의 최후, 각 형제들 이름만 들어도 익히 들어봤을 이름이다. 그만큼 큰 일을 많이 했다.
첫째 이건영,
이건영의 둘째아들 이규면은 신흥학교 졸업 뒤 머나먼 중국땅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
이건영의 셋째아들 이규훈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뒤 귀국, 국군 공군대위로 복무중 한국전쟁때 실종.
둘째 이석영
가장 많은 돈을 보탠 둘째 이석영은 중국 빈민가를 80의 나이에 떠돌다 굶어 죽음,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은 김원봉의 의열단원으로 이해명과 함께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
셋째 이철영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병사
넷째 이회영
모든 계획의 중심에 섰던 넷째 이회영은 일흔이 다되어가는 나이에 독립활동하다 걸려 모진 고문 끝에 숨짐. 이회영 선생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임시정부를 만들면 또 그 안에서 분열된다 하여 임시정부를 참여 하지 않는 등 양반의 머리에서 이런 발상이 나온 것 자체가 엄청나게 진보적,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에 따르면 “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이회영의 둘째아들 이규학은 사촌 이규준과 함께 밀정 암살 가담.
이회영의 셋째아들 이규창은 친일파 암살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고 광복 뒤에야 석방.
다섯째 이시영
유일하게 살아남아 해방을 본 다섯째 이시영은 독립 후 김구 선생님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초대부통령이 됨.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국민방위군사건,거창양민 학살사건등 이해할수없는 1인 천하 독재만행에 항거 부통령직 사임.
여섯째 이호영
막내 이호영은 만주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33년 소식이 끊김
이호영의 아들 이규황, 이규준도 함께 실종 (몰살당한걸로 추정)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우리가 기리고 기억하며 추념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있고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힘으로 자주독립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 조국 내 나라에 대한 독립운동은 독립하는 그 날까지 계속 되었을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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