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그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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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8

재료보다 양념이 더 부각된 약간은 불편한 다큐 - 직지코드 토요일 주말 늦은 시간 TV 앞에 있었다면 KBS1 채널에서 해주는 직지코드라는 이 영화를 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중파 채널만 하더라도 SBS에서는 막 "폼나게 먹자"가 끝나기 직전이었고 그 시간 자체가 새벽 1시를 달리는 시점이라 보던 방송이 끝나면 여기서 이불 속으로 들어간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MBC 에서는 "나 혼자 산다"라는 전체 방송 예능 1위 간판 프로그램도 막바지 달리기를 하는 중이었고 KBS2 마저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방영을 막 하려는 시점이라 사방에 볼거리가 있는 당시 시점에서 KBS1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공중파에서 그것도 주말 밤에 방영을 했지만 워낙 시청 시간대 입지가 좋지 않아 본 사람보다 보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을 것 같다.KBS1 채널에서는 독립영화라는 프로그.. 2018. 10. 22.
여진에게 동북 9성을 반환한 고려, 이해득실과 고려의 외교술 고려의 여진 2차 정벌로 인해 획든한 동북 9성, 하지만 고려는 여진과 2년 후 긴급 회담을 갖게 된다. 여진은 동북 9성 지역을 다시 돌려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고려는 어렵게 얻은 영토지만 여진에게 동북 9성을 돌려주기로 결심하게 되는데 왜 고려는 동북 9성을 쉽게 포기했는지, 그리고 동북 9성을 포기하게 됨으로 얻게 되는 또 다른 이득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시간이다.동북 9성은 고려와 여진의 전쟁으로 승리를 거둔 고려가 획득한 영토다. 하지만 이내 동북 9성 반환을 놓고 고려와 여진은 팽팽하게 맞서게 된다. 2차 정벌로 대승을 이룬 고려이지만 여전히 동북 9성 일대에서는 여진족의 잔당 세력이 고려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여진은 화친 조건으로 동북 9성을 반환해 줄 것을 요청.. 2016. 6. 30.
학교 시험에 서희의 강동 6주는 단골로 출제 되는데 윤관의 동북9성은 절대 안 나오는 이유 고려사를 다루면서 역사저널 그 날에서 나왔던 동북 9성, 현재 윤관에 의해 여진 정벌 당시 획득한 동북 9성의 위치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상당히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이지만 학교에서 시험 문제로 출제되지 않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대략 어느 위치로 짐작은 할 수 있으나 그 지역이 북한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만주 지역으로 추정만 할 뿐이고 또한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동북 9성의 위치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시비를 걸고 있어 논란에 빠졌다.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 고유의 역사이고 중요한 지역인데도 역사 과목에서 크게 다루지 못하고 학생들에게도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게 동북 9성이다. 여진족과 담판 싸움으로 고려가 획득한 9개의 성은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2016. 6. 27.
강감찬 장군과 거란, 그리고 현종과 고려 - 5 친조 약속을 어기고 거란 주변국과 또 교역을 하면서 거란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고려거란은 이런 고려를 혼쭐 내주기 위해 제3차 침공을 감행한다. 하지만 고려는 이미 전쟁 대비를 충분히 하고 있었다. 강감찬 장군의 전투 승리에 숨은 비결은 가죽과 노끈, 물둑을 만들어 흔히 생각하는 살수대첩, 수공을 펼쳤다. 흥미로운 사실은 기록상의 기준으로만 보면 수공의 원조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아닌 강감찬의 흥화진 전투라는 것인데 강감찬의 흥화진은 고려 당시에 기록된 수공이고 살수대첩은 일제시대에 쓰여진 기록으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기록은 일제시대 기록된 자료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근거가 불확실해서 을지문덕 장군이 크게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 보다는 수공으로 크게 대승을 이루었지 않나 하는.. 2016. 6. 4.
거란 성종에게 끌려간 하공진은 어떻게 되었을까? - 4 왕과 신하들이 개경의 궁을 떠나고 모두 피신한 상황에서 거란 성종을 찾아 거란군이 회군할 것을 정중히 요청한 고려의 사신 하공진, 결국 고려왕이 직접 찾아 인사를 드리겠다는 회유에 거란군과 성종은 거란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신으로 왔던 하공진은 그 대신 포로로 잡혀 거란군과 함께 거란 진영으로 끌려가는데...거란의 성종은 하공진의 품성과 용기 있는 모습에 반해 그를 포로로 데리고 왔지만 후하게 대접하고 양가집 딸을 직접 골라서 배필로 삼게 해주어 거란에서 함께 큰 일을 하고자 회유했다. 그런 하공진은 거란 선종의 뜻에 따라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려군이 재정비를 하고 고려 현종이 궁으로 무사히 돌아오기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또 다른 계략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환대에 응하면서도 속으로는.. 2016. 6. 4.
강감찬을 등용한 현종, 정변에 의해 왕이 된 그는 누구인가? - 3 하공진과 강감찬 덕분에 큰 위기를 벗어난 고려와 고려의 현종, 고려의 현종 목을 노리고 온 거란군에게 명문을 주며 회군을 할 것을 요청하고 그것이 받아들여 거란이 회군을 하자 회군하는 거란군 일부를 쫒아가 다시 기습 공격하여 포로로 잡혀 끌려간 백성 3천여명을 찾기도 한다. 죄송합니다~하고 사죄를 올리며 군사를 되돌려 거란으로 돌아갈 것을 먼저 요구한 고려는 그들이 회군하자 곧바로 역공을 취하는데 보통은 상상하기 힘든 일로 고려가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조선시대 몽진(피난길)에 오른 굴욕적인 임금은 선조와 인조, 하지만 고려의 현종과는 차이가 있다.고려의 현종은 전략적인 이유로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었지만 조선의 선조, 인조는 말 그대로 피난길 고려시대 현종은 개경에서 .. 2016. 6. 4.
강감찬 장군, 그는 왜 현종에게 몽진을 권유했을까? - 2 거란의 40만 대군이 고려에 침공하자 왕의 피난(몽진)을 주장한 강감찬, 그는 왜 싸우지 않고 먼저 도망가자고 했을까?앞뒤 따지지 않고 보면 그의 주장과 행동은 장수로서 할 수 없는 비겁한 행동이지만 사실 그건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침공한 거란족의 상황 뿐만 아니라 거란 전체의 상황을 보고 판단한 현명한 선택 중 하나 강감찬은 거란의 침공이 고려와 전면전을 벌여 굴복 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종속관계에서 다시금 우위를 다지기 위한 포석이고 또한 송, 여진과의 교역에 불만 표시 및 강조의 정변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수준이기 때문에 굳이 맞짱(?)을 뜰 이유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란에 대해 총 공세로 맞서 싸우는 건 고려 입장에서 의미가 없고 말 그대로 시간이 해결해 .. 2016. 6. 4.
기록에도 존재할 정도로 못난이로 유명한 고려의 장군 강감찬과 현종의 몽진 1009년,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새로운 왕으로 세운다. 1년 후 거란의 성종은 신하로서 왕을 폐위한 강조의 책임을 묻겠다며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거란은 통주에서 대승을 하며 그곳에 있던 강조를 결국 죽이고 수도 개경까지 진격한다.위기에 처한 고려, 이때 강감찬 장군이 나서는데 그가 가장 먼저 왕에게 한 말은 "몽진"(피난)이었다. 왜? 강감찬 장군이 싸우기 보다는 몽진을 먼저 하자고 주장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강감찬 장군하면 제일 먼저 떠오로는 게 서울의 낙성대, 어떤 사신이 밤중에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관리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 사내아이가 바로 강감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낙성.. 2016.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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