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40만 대군이 고려에 침공하자 왕의 피난(몽진)을 주장한 강감찬, 그는 왜 싸우지 않고 먼저 도망가자고 했을까?
앞뒤 따지지 않고 보면 그의 주장과 행동은 장수로서 할 수 없는 비겁한 행동이지만 사실 그건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침공한 거란족의 상황 뿐만 아니라 거란 전체의 상황을 보고 판단한 현명한 선택 중 하나
강감찬은 거란의 침공이 고려와 전면전을 벌여 굴복 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종속관계에서 다시금 우위를 다지기 위한 포석이고 또한 송, 여진과의 교역에 불만 표시 및 강조의 정변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수준이기 때문에 굳이 맞짱(?)을 뜰 이유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란에 대해 총 공세로 맞서 싸우는 건 고려 입장에서 의미가 없고 말 그대로 시간이 해결해 주는 싸움으로 정변을 일으킨 강조는 이미 잡혀 처형을 당했기 때문에 그들이 애초에 온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어 곧 물러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서워서 도망간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싸움을 회피한 것으로 봐야 하며 고려군을 재정비해야 할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에 몽진을 선택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
항복을 하자는 다른 신하와 달리 몽진을 해서 일단 시간을 벌자는 강감찬, 그의 영향력이 어느정도 인지 기록을 보면 아는데 몽진에 대한 결정을 한 날 현종은 바로 개경을 빠져나갔을 만큼 강감찬을 신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감찬은 현종 이전까지는 뚜렷한 활동 기록이 없는데 정변으로 즉위한 현종이 자신의 신변과 상황이 불리하다 보니 새로운 인물로 주변인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강감찬 장군이 눈에 들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재연 방송처럼 실제로 하공진은 고려 왕이 어디있느냐는 말에 아주 멀리 가버려 쫒아가기에는 이미 늦었다라고 하며 이쯤에서 거란으로 다시 돌아가는게 어떻겠느냐고 거란 성종을 회유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르지만 만약 거란의 성종이 여기서 하공진 말을 듣고 물러간다면 하공진의 역활은 전쟁을 종식시키는 일이기에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거란 성종은 하공진의 말을 듣고 난 뒤 회군을 결정한다. 단 고려의 사신으로 온 하공진은 포로로 억류하여 데리고 간다
거란족의 상황과 싸움의 명분을 활용한 임금의 몽진은 결코 도망이 아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던 셈이다.
하공진 이름을 듣다보니 문제적 남자의 하석진이 생각난다. 같은 집안일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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