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미제로 남은 군 사건 - 허일병(허원근) 사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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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수사반장

1984년 미제로 남은 군 사건 - 허일병(허원근) 사망 사건

by 깨알석사 2015.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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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일지

 

 

1983년 허원근 군입대

 

 

1984년 4월 2일 오전 11시경. 강원도 최전방부대인 7사단 3연대 1대대 3중대 폐유류 창고 뒤편에서 중대장 전령이었던 허원근(당시 21세) 일병이 숨진 채 발견.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의 총상이 발견됨

 

 

허일병의 중대장 [자살]로 상부에 보고

 

 

육군 2군단 헌병대 [자살]로 조사완료

 

 

7사단 헌병대 [자살]로 조사완료

 

 

1군 사령부 헌병대 [자살]로 조사완료

 

 

조사결과에 따른 사망(자살) 이유는 허 일병이 평소 중대장의 가혹행위와 폭력에 괴롭힘을 당하다 군 복무에 대한 염증을 느꼈고, 자살 당일 아침에도 중대장한테 전투복 상의가 잘못 다려졌다는 이유로 꾸중을 듣고, 철모 관리 소홀로 고참병한테 폭행당하자 심한 강박감으로 복무 의욕을 상실하고 자살했다는 것

 

 

유족들 이의제기 및 타살 의혹 제시

 

 

1990년 육군범죄수사단 재조사 - 자살로 판정

 

 

1995년 육군본부 법무감실 재조사 - 자살로 판정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재조사 - [타살]로 판정

 

 

2002년 국방부 특별조사단 재조사 - 자살로 판정

 

 

2003년/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기 발족 및 재조사 - [타살]로 재확인

 

 

- 2기 의문사위 재조사시 [권총사건 발생] : 의문사위 조사관이 국방부 조사관의 허일병 관련 서류를 압수하자 국방부 조사관이 권총으로 협박하였다는 것으로 감사원 조사 결과 권총이 아닌 가스총으로 밝혀짐, 총기류의 종류만 다를 뿐 관련 행위는 사실

 

 

2007년 유족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제기

 

 

2010년 1심법원 타살로 판정, 국가손해배상 판결

 

 

1심 법원은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부대원들 진술이 서로 모순되고, 부대원 개개인의 진술도 오락가락하는 점을 감안해 이들의 진술을 완전히 배제하고, 허 일병 사체와 법의학적 소견만을 근거로 판단해 ‘타살’이라고 결론

 

 

2013년 2심법원 타살이 아닌 자살로 판정, 국가손해배상 일부 인정

 

 

대법원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지금까지 남은 증거나 증언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최종 결론, 10 번의 군수사 당국의 조사와 2번의 의문사위 조사, 1심·2심 법원 판결을 거듭한 ‘허원근 일병 의문사’는 사건 발생 31년 만에 대법원에서 미제(未濟)로 최종 결론이 났다.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이 재조사 계기 및 조사 내용 (조선일보 기사 내용 발췌)

 

 

의문사위 조사는 ‘자살하는 사람이 스스로 M16 소총으로 세발씩이나 쏘아 죽을 수 있을까’라는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 휴가를 하루 앞둔 허 일병이 자살할 이유로 뚜렷하지 않았다. 의문사위는 13명의 부대원을 불러 조사하고, 군 수사 당국이 남겨 놓은 부검 결과 등을 토대로 2002년 8월 ‘술 취한 상관 총에 맞아 숨진 사병을 군이 조직적으로 자살로 은폐한 사건’이라고 결론 내리며 기존 군 수사를 완전히 뒤집었다.

 

 

사고 당일인 1984년 4월 2일 새벽까지 중대장실에서는 소대장 진급 축하 술자리가 열렸고, 중대장 전령이었던 허 일병은 술자리에서 안주를 준비하는 등 뒷바라지 중이었다. 술자리에서 중대장과 말다툼을 벌이다 화가 난 노모 중사가 내무반으로 뛰쳐들어가 사병들을 발로 차면서 화풀이를 하던 도중 M16 소총을 꺼내 개머리판으로 허 일병을 내리쳤고, 허 일병이 이를 팔로 막자 노 하사가 총 쏘는 자세를 취하던 중 탄환 한 발이 발사돼 허 일병 가슴에 맞았다. 중대장은 상부에 자살했다고 허위 보고하고, 중대원들에게 내무반 물청소를 지시해 핏자국을 닦아내도록 했다. 허 일병은 오전 10~11시쯤 폐유류 창고로 옮겨졌고, 누군가가 2발을 더 발사한 뒤 자살로 은폐했다는 것이다.

 

 

의문사위가 이런 결론을 내린 데는 당시 부대원 전모 병장의 증언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하지만 나머지 부대원들은 의문사위 발표에 “불확실한 추측으로 우리를 타살 집단으로 몬다”고 반발하면서 진실 공방으로 이어졌다. 18년이라는 세월의 한계 탓에 의문사위 결론은 사고 당시 상황과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았다. 당시 부검 결과와도 어긋났다. 당시 부검서에는 허 일병이 3발을 맞을 동안 살아있었음을 보여주는 ‘생체반응’이 기재돼 있었다. 의문사위 결론대로라면 사고 당일 새벽 내무실에서 첫발을 맞고, 7~8시간 뒤 폐유류고로 옮겨진 뒤 2발을 더 맞을 때까지 허 일병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또 굳이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 2발을 더 쐈다는 것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의문사위 결론에 여러 의문이 제기됐지만, 발표 내용 자체만으로도 국민에게는 물론 군당국에게 충격적이었다. 국방부는 곧바로 육군 중장을 단장으로 특별조사단을 꾸려 재조사에 나섰다. 특조단의 결론은 자살이었다. 조사 결과 부대원들은 사고 당일 오전 평소대로 일상업무가 진행됐고, 오전 10~11시 3발의 총성을 들었고, 이후 허 일병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스스로 3발을 쏘아 자살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해서도 “희귀하지만, 사례가 있다”며 과거 사례를 제시했다. 국방부 특조단은 ‘내무반에서 핏자국을 봤고 물청소로 씻어냈다’ 등 의문사위가 타살의 근거로 삼았던 부대원 진술에 대해 “각본에 따른 유도질문이나 강요에 의한 허위진술 결과였다”며 “의문사위가 자살을 타살로 날조·조작해 허 일병 동료 부대원들의 인권을 말살했다”고 비판했다. 이후 사건은 하나의 진실을 두고 결론을 달리 본 국가기관끼리 정면 충돌하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국방부는 허일병이 자살하려고 가슴에 총을 쐈는데 죽지 않자 한방을 더 쏘고 그 뒤로도 죽지 않자 한참 뒤 머리에 다시 한방을 쐈다고 설명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더군다나 M16은 권총이 아니기에 가슴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기 어렵다. 국방부는 손이 아닌 발로 방아쇠를 당겼다고 설명하는데 이런 설명은 죽을 사람이 참 어렵게 죽으려고 한다는 것 밖에 이해가 안된다. 자살하는 사람이, 더군다나 군대에서 발생하는 총기 사고치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 설명이다.

 

 

우리집에 M16 개량 모형총이 있다. 정확한 이름이 기억안나지만 말이 M16계열이지 현재 미군이 사용하는 신형 총기류에 속한다. 지금은 시판이 안되지만 기존에는 사실에 가까운 모형총이 많이 나왔다. (장난감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총구 끝에 빨간색이 칠해져 있다 - 난 그 이전이라 모양은 일반 소총과 똑같다) 일반 장난감은 플라스틱 재질이지만 내 총은 철제 그대로다. 그래봤자 비비탄용이고 분해는 할 수 있어도 비비탄 이상은 곤란하다. 개조하기 힘든 그야말로 조금 좋은 장난감일 뿐..근데 이 녀석 가지고 한번 따라 해보면 이건 자살하기 참 어렵다. 목에 대고 쏘는건 그나마 쉬운데 머리에 쏘거나 가슴에 쏘는건 총이 길어 솔직히 힘들다. 군대에서 우리들이 가장 많이 배우는게 뭘까? 엄폐와 은폐다...군사고를 엄폐하고 은폐하는 것도 군대 주특기가 아닌가 싶다. 그냥 조사하면 전부 자살이요, 유족이 항의하거나 방송에서 다루어져야 그나마 일부가 타살로 나온다. 일부가 타살로 나온다는 것 자체가 조사의 오류가 있다는 뜻...

 

 

직접적으로 허일병을 총기로 쏜 중사, 그리고 나중에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허일병에게 일부러 2발의 총을 더 쏜 사람,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는 미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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