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자취방에 놀러 온 어느 날 이었다. 늦잠을 자고 있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다.
오빠 나 지금 출발~
다른 사람과 달리 빨간 날 쉬지 않고 이틀에 한 번 꼴로 휴무가 있던 그녀는 휴무가 되면 곧잘 나를 보러 놀러 왔다. 이틀에 한 번 쉴 때도 있고 삼 일에 한 번, 또는 이틀 붙여서 쉴 때도 종종 있다. 따져보니 한 달에 15일은 쉬는 것 같다. 노동 강도는 좀 있어도 급여나 휴무만 보면 그래도 괜찮은 직장 같다. 애초에 노동 강도가 좀 있으니 휴무를 이렇게 주겠지만..
아무튼 얼른 씻고 같이 날씨 좋은 덕에 즐거운 데이트를 즐겼다. 집 근처에 대형마트와 영화관이 있어 도보로 장보기도 쉬운 편인데 가끔은 우리 둘이서 마치 신혼부부가 된 것 마냥 장보기를 같이 할 때도 많았다, 그 때 처음 그녀의 치즈케이크 취향을 알았고 가끔 토라질 때면 치즈케이크로 달래줄 때도 있었다.
내 방에는 케이블TV가 연결된 모니터가 있다. 오피스텔인데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두 사람이 쓰기에는 딱 좋은 풀옵션 방이었다. 침대와 에어컨, 인터넷과 TV보기가 되는 TV와 장식장, 냉장고, 세탁기는 물론 인덕션도 있고 인터넷도 무료고 케이블TV 시청료도 따로 내지 않고 오피스텔 전체가 통으로 계약을 해서 다시보기도 다른 집과 달리 무료가 많았다. (요금제가 일반용이 아니라서 다르다고 했다) 그래서 인터넷이나 케이블이 잘 안되면 KT가 아닌 관리사무소로 연락해야 하는 그야말로 풀옵션이라 영화보기에는 딱 좋았다.
지금이야 풀옵션 방에 이런게 흔하디 흔하지만 내가 자취할 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풀옵션이 막 등장하는 초창기라고 보면 된다, 수도요금도 없고 내가 부담해야 하는 건 오로지 오피스텔 월세와 전기요금, 그리고 세탁실에 설치된 보일러 때문에 가끔 쓰는 도시가스 요금이 전부였다.
도시가스요금, 전기요금, 물값, 인터넷요금, 케이블TV요금만 하더라도 모이면 꽤 크다. 자취하는 사람에게는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나는 건물이 막 완공된 시점에서 거의 첫 입주자로 들어가 특혜 아닌 특혜도 받았다. 빈 집이 있어야 그걸 보고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난 완공되고 일주일 지나 이제 막 입주자 모집하는 새 오피스텔에서 딱 두 집이 현재 살고 남은 빈 집 중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걸 고를 수 있었고 남향, 북향, 엘리베이터와의 거리, 층수, 비상계단 위치 등 방 위치와 관련한 다양한 선택을 마름대로 할 수 있었다. 더불어 원래 알려진 월세보다 10만원 정도 줄여 35만원에 계약했다. 일단 건물주가 빈 방을 절반 이상은 채워야 안심이 되니 초기에는 이런 저런 신경을 많이 쓸 수 밖에 없는데 보증금을 조금 더 주는 걸로 하고 월세를 줄였다. (그래봤자 보증금도 파격적으로 500만원이었다)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조건
11평이고 실거주 7평으로 화장실 있고 지금 이런 오피스텔을 쓰려면 아마 서울에서는 50만원 이상은 부담해야 할 것이다. 돈 아끼겠다고 저렴한 방 얻어도 가스/전기/수도/인터넷/케이블까지 감안하면 돈 10만원은 훌쩍인데 그게 다 무료이니 그만큼 35만원도 실제 방값은 25만원이 될 수 있는게 이 집이었다.
여러가지로 만족했던 이 집은 그녀에게도 만족스러움을 주었다. 새 집이라 깔끔했고 월세 부담도 많지 않으면서 다른 집보다 여유 공간이 많으니 잇점이 많았다. 당시 그녀도 다른 지역에서 오피스텔 거주를 했는데 세는 많으면서 에어컨과 난방(보일러)은 중앙 컨트롤 방식이라 난방을 아무리 해도 춥고 에어컨을 아무리 틀어도 시원하지 않아 고생이 많았다.
당시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이런 저런 밥벌이 구상을 할 때라 사실 나가는 돈에 대해 신경을 은근 많이 썼던 시기다. 데이트 비용이라는게 아낀다고 아낄 수 있는게 아니고 나가면 먹으면 "돈" 나가서 뭘 사면 "돈" 나가서 영화를 봐도 "돈" 나가는 그 자체가 기름값, 통행료 "돈"이라 데이트 비용도 만만치가 않다. 가끔 나가서 숙소라도 잡으면 그 숙박비만해도 부담되는 건 사실
언제부터인가 그래서 되도록이면 자취방에서 데이트 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시원하거나 따뜻한 방에서 영화도 볼 수 있고 음식도 해먹을 수 있고 가까운 곳에 공원과 백화점도 있고 유명한 먹자골목도 있어 볼거리 놀거리 구경거리가 많은 곳에 집이 위치해 사실 멀리 갈 필요성이 없었는데 그래서일까.
내 마음을 일찍 읽었는지 그녀도 대체로 방에서 놀아주는 걸 따라주었다. 물론 너무 집에 있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 투정은 가끔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가 집에서 놀다가 돌아간 날, 담배를 사러 냉장고 위에 있던 지갑을 들고 나가려던 찰나 지갑에 내가 모르는 현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분명 가지고 있던 현금은 어제 썼고 어제 밤부터는 카드만 썼었는데 갑자기 3만원이 내 지갑에 꽂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혹시 내 지갑에 돈 넣어두고 깜박했어?
그러자 그녀는
깜박한 거 아니야. 우연히 오빠 화장실 있을 때 냉장고 위 지갑 봤는데 돈이 하나도 없더라구. 남자가 돈 한장 없이 다니면 폼이 안난다잖아. 나도 가진 현금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오빠 지갑에 현금 하나도 없길래 3만원 정도 넣어두었지
사실 이 일이 있기 몇 달전에 우연히 난 다른 친구를 통해 비슷한 일을 듣게 된 적이 있다. 자기 지갑에 돈이 별로 없다는 걸 안 여자친구가 자기 몰래 5만냥을 찔러주고 용돈하라고 했다는 건데 내 돈은 내 돈이고 오빠 돈도 내 돈이야 라는 인식이 여자들에게 없다고 할 순 없어 그런 경우 그 여친 대단하네~라고 하는게 남자들인데 그 이야기 듣고 약간 부러워하긴 했지만 그게 나에게도 똑같이 생길 줄은 몰랐다. (어쩌면 내 생각과 달리 모든 여친들이 다 그렇게 하는 걸지도...)
아 그래..3만원 나 쓰라고 넣어준거야?
그렇다는 말에 약간 심쿵, 요즘 투정을 많이 부려서 서로 토라질 때도 많았는데 이렇게 훅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니 약간 심쿵이었다. 담배를 사러 가는 길, 계산대 앞에서 담배를 사고 돈을 내미는데 나도 모르게 움찔 했다. 그녀가 준 돈이 마치 스타가 준 선물처럼 순간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쓰지 말고 보관할까...이런 생각까지 (후손대대로 이 돈을 물려주라~)
신용카드로 담배값을 지불해도 되지만 그래도 돈 걱정 많다고 챙겨준건데 카드 안쓰는게 스트레스 덜 받는 것이고 그걸 또 바라고 준 돈이니 돈을 쓰는게 낫다고 여겨 현금을 내긴 했지만 그 돈이 그렇게 아깝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이후 나도 한 번 챙겨줘야지라는 마음은 있었는데 끝까지 그녀 지갑에 돈을 충천해 주지는 못했다. 물론 내 나름대로 더 많은 보상과 사랑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생각과 달리 행동이 더딘 건 어쩔 수 없다.
자기가 모르는 돈이 지갑에 있는 걸 보았을 때, 그리고 그 돈이 누군가 나를 위해 챙겨주려고 넣어 두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 기분은 겪어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특히 당연시 하는 가족이 아닌 사랑하는 애인 덕분에 이런 경험을 한다면 그 사랑의 감정이 배가 된다. 내가 그랬다. 돈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마음이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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