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태그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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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4

강감찬 장군과 거란, 그리고 현종과 고려 - 5 친조 약속을 어기고 거란 주변국과 또 교역을 하면서 거란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고려거란은 이런 고려를 혼쭐 내주기 위해 제3차 침공을 감행한다. 하지만 고려는 이미 전쟁 대비를 충분히 하고 있었다. 강감찬 장군의 전투 승리에 숨은 비결은 가죽과 노끈, 물둑을 만들어 흔히 생각하는 살수대첩, 수공을 펼쳤다. 흥미로운 사실은 기록상의 기준으로만 보면 수공의 원조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아닌 강감찬의 흥화진 전투라는 것인데 강감찬의 흥화진은 고려 당시에 기록된 수공이고 살수대첩은 일제시대에 쓰여진 기록으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기록은 일제시대 기록된 자료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근거가 불확실해서 을지문덕 장군이 크게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 보다는 수공으로 크게 대승을 이루었지 않나 하는.. 2016. 6. 4.
강감찬을 등용한 현종, 정변에 의해 왕이 된 그는 누구인가? - 3 하공진과 강감찬 덕분에 큰 위기를 벗어난 고려와 고려의 현종, 고려의 현종 목을 노리고 온 거란군에게 명문을 주며 회군을 할 것을 요청하고 그것이 받아들여 거란이 회군을 하자 회군하는 거란군 일부를 쫒아가 다시 기습 공격하여 포로로 잡혀 끌려간 백성 3천여명을 찾기도 한다. 죄송합니다~하고 사죄를 올리며 군사를 되돌려 거란으로 돌아갈 것을 먼저 요구한 고려는 그들이 회군하자 곧바로 역공을 취하는데 보통은 상상하기 힘든 일로 고려가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조선시대 몽진(피난길)에 오른 굴욕적인 임금은 선조와 인조, 하지만 고려의 현종과는 차이가 있다.고려의 현종은 전략적인 이유로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었지만 조선의 선조, 인조는 말 그대로 피난길 고려시대 현종은 개경에서 .. 2016. 6. 4.
강감찬 장군, 그는 왜 현종에게 몽진을 권유했을까? - 2 거란의 40만 대군이 고려에 침공하자 왕의 피난(몽진)을 주장한 강감찬, 그는 왜 싸우지 않고 먼저 도망가자고 했을까?앞뒤 따지지 않고 보면 그의 주장과 행동은 장수로서 할 수 없는 비겁한 행동이지만 사실 그건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침공한 거란족의 상황 뿐만 아니라 거란 전체의 상황을 보고 판단한 현명한 선택 중 하나 강감찬은 거란의 침공이 고려와 전면전을 벌여 굴복 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종속관계에서 다시금 우위를 다지기 위한 포석이고 또한 송, 여진과의 교역에 불만 표시 및 강조의 정변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수준이기 때문에 굳이 맞짱(?)을 뜰 이유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란에 대해 총 공세로 맞서 싸우는 건 고려 입장에서 의미가 없고 말 그대로 시간이 해결해 .. 2016. 6. 4.
기록에도 존재할 정도로 못난이로 유명한 고려의 장군 강감찬과 현종의 몽진 1009년,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새로운 왕으로 세운다. 1년 후 거란의 성종은 신하로서 왕을 폐위한 강조의 책임을 묻겠다며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거란은 통주에서 대승을 하며 그곳에 있던 강조를 결국 죽이고 수도 개경까지 진격한다.위기에 처한 고려, 이때 강감찬 장군이 나서는데 그가 가장 먼저 왕에게 한 말은 "몽진"(피난)이었다. 왜? 강감찬 장군이 싸우기 보다는 몽진을 먼저 하자고 주장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강감찬 장군하면 제일 먼저 떠오로는 게 서울의 낙성대, 어떤 사신이 밤중에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관리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 사내아이가 바로 강감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낙성.. 2016.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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