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에 대한 고찰 - 부모세대의 공교육 VS 자녀세대의 공교육 (나머지 공부, 스승, 보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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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훈육보육

선생님에 대한 고찰 - 부모세대의 공교육 VS 자녀세대의 공교육 (나머지 공부, 스승, 보호자)

by 깨알석사 2015.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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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공교육의 선구자로서 공교육이 무너지도 선생님만 제대로라면 공교육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살릴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선생님이 무너지면 공교육도 무조건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공교육은 다시 살리기 힘들다. 공교육이 잘되고 공교육이 대접 받기 위해서는 교권의 권위, 즉 선생님의 권위가 올라가야 하는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선생님의 위상이 떨어진 건 이유가 없다. 선생님의 위상이 떨어진 것에 대해서 사회요인, 시대에 따른 학생들의 인식 차이, 공교육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부모들의 인식 차이, 사교육 중심에서 벌어진 공교육 종사자에 대한 터부시가 주요 요인으로 꼽지만 깨알박사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선생님의 위상이 떨어진 근본적인 이유는 선생님 그 자체에 가장 큰 문제로, 교사라는 직업을,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희생한다는 각오로 몸바쳐 아이들 교육에 힘쓰겠다고 도전한 과거와 달리 안정된 직장, 평생직업, 대접받는 사회 분위기, 공무원이라는 신분, 결혼대상자 우선순위의 매력적인 직업으로 변질되면서 그 자리를 탐내는 순전히 안정된 직장과 직업의 개념으로 도전하는 선생님들이 많아지면서 교육자의 본질은 사라지고 직업이라는 자리만 남게 되면서 교육자의 위상 자체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교육보다 돈이 우선이라면 위상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왜 선생님이 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어떤 이유로, 어떤 목적으로 되었는지 선생님 스스로 자문하거나 마음 깊이 양심껏 소신발언 한다고 할 때 안정된 직업이라는 그 부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의 선생님들 모습이 더 좋았고 더 매력적인건 과거 선생님 직업이 사실 그렇게 좋은 직업에 속하지 않았고 돈벌이로서의 가치로만 본다면 그렇게 인정받는 고수익 집단도 아니기에 돈보다는 인재양성, 후학양성을 하는 스승의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선생님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것도 과분하다. 내가 보기에는 오로지 직업을 뜻하는 교사라는 말은 있어도 스승은 물론 선생님이라는 말 자체도 없다라고 해야 더 맞지 않나 싶다. 선생님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대단한 단어다. 한자어 뜻 그대로다 굳이 해석해서 풀어쓰지는 않겠다. 인간으로 태어나 다른 인간에게 대접받는 최고의 명예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정한 선생님이란 부처나, 공자와 같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이지만 학교에 있는 선생님들에게도 선생님이라는 말을 과거부터 지금까지 독보적으로 쓰게 된 것도,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부르는것도 선생님이라는 말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는 곧 학교의 교사가 선생님다운 선생님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던 나머지 공부, 지금은 학원이 있어 이런 제도가 없지만 그래도 공교육 테두리안에서 방과후 학교라는 제도로 비슷하게 운영은 한다. 하지만 방과후 학교는 학교가 끝나고 나서 교육수준과 상관없는 별도의 개별 교육과정이라 나머지 공부와는 완전히 다르다. 나머지 공부는 그날 배운 학습이 미진하거나 다른 아이들과 함께 교육내용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학교에 남아 공부를 시켜주던 것을 말하는데 어린 당시에는 몰랐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나머지 공부가 준 의미와 나머지 공부가 가져다 준 결과물을 본다면 선생님의 나머지 공부는 학원처럼 돈만 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애정이 없으면 절대 성립하기 어려운 생각외로 괜찮은 제도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선생님에 대해 한번은 생각해 보자. 초등학교 6년, 중학교, 고등학교 합쳐서 6년 총 12년의 기본교육은 대부분이 받는다. 서양에서도 12학년 개념으로 비슷한 시기와 연령으로 공교육이 실시되는데 유치원과 대학교 과정은 사실 학원과 같은 개념이라 대학과정의 경우 애초에 개인 프로필, 약력에 중요한 것으로 기재되는 것도 사실 난 탐탁치 않게 여긴다. 이력서와 같이 자신을 부각시키고 자신을 보여주어야 할 때는 이력으로서 대학과정이 소개되고 상세하게 열거되어야 하지만 일반 약력에서도 굳이 학력과 관련한 내용, 그것도 대학과정이 중심이 되는 건 우리사회가 갖는 고질병 중 하나다. 초중고의 공교육 개념의 학력이 아닌 그 외적인 것까지 쓴다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까지 써야 맞지 않겠나. 물론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이용한 수많은 모든 학원들 (스포츠나 무도학원과 같은 예체능 포함) 도 써야 발상이 맞는데 그게 참 웃기는 짬뽕이다. (선생님 이야기를 하다가 옆길로 셌다. ㅠ.ㅠ)

 

 

우리는 대부분 특별한 경우(자퇴, 퇴학)를 제외하고는 12명의 선생님을 누구나 만나게 된다. 진짜 좋은 선생님이고 선생님이라는 그 단어 자체에 걸맞는 분들이라면 12명이 다 좋고 기억해야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은 예외로 하죠, 기억 자체를 못하니...) 하지만 머리통이 큰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의 선생님 6명만 따로 추려내도 6명이 모두 기억에 남는 좋은 선생님들, 최고의 스승이라고 손꼽기 어려울 것이다. 있어야 한두명이고 아예 없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스승이 스승답지 않은 경우의 수가 훨씬 더 많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인생에 있어 삶 자체를 변화시켜준 학교의 선생님, 말 그대로 스승다운 스승이 한명 이상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런 스승을 만났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절반이 안된다는 건 스승의 자리와 권위가 떨어진게 아니라 선생님 스스로가 권위롭지 못한 부실한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는 초등학교 스승 한분, 중학교 스승 두분, 고등학교 한분의 스승이 존재한다. 이 스승들에 의해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초등학교 은사님은 학교가 재미있는 곳이라는 걸 알려준 당시에는 보기힘든 20대의 남자 선생님이었고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인데 우리를 맡고 나서 나중에 군대를 가셨다 ㅡ.,ㅡ) 선생님 집에 놀러가서 누나 같은 사모님(?)이 차려준 간식상과 놀이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 집에 초대한 선생님이 극히 드문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이건 누리기 힘든 소중한 경험이고 값진 경험이다. 이 자체만으로 이 선생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느낌이 올 것이다. (참고로 초등학교는 대도시의 번잡한 초등학교로 시골학교에서 가능하다고 오해하지 말자. 그래서 더 대단하다)

 

 

중학교 선생님 두 분은 모두 여자 선생님이다. 내 인생의 최악의 코스로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지우고 싶은 불우한 시절이며 나쁜 기억이 더 많은게 중학교 시절로 집 형편 때문에 학업에 어려움이 많던 시절이다. 한분은 도덕 선생님이자 1학년 담임이고 한분은 국어 선생님으로 담임은 아니시다. 담임이자 도덕 선생님은 친구 같은 선생님으로 아이들과 항상 어울려 주셨고 항상 우리들을 챙겨준 마음여린 선생님이다. 마음고생이 많았던 시절인 만큼 엄마같은 느낌, 누나같은 느낌을 많이 준 정신적으로 많이 챙겨준 선생님으로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국어 선생님은 내 소질을 발견하게 해준 분으로 내가 몰랐던 소질과 내 자심감을 만들어준 분이다. 그 분 덕에 성년이 되고나서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만든 분으로 그분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항상한다.

 

 

고등학교 스승 한분은 국사 선생님이다. 설립된지 얼마 안된 학교라 (정확히 말하면 내가 1회 졸업생으로 학교 공사가 마무리 안된 상태에서 입학했다) 선생님 정원이 모잘랐는지 아니면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지 국사와 윤리 과목을 두 개 맡아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학교 교육은 이런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교육계의 혁신이자 공부의 방법을 달리보게 만든 분인데 교과서는 참고서일뿐 주체가 될 수 없다라는 걸 알게 해준 분으로 교과서대로 수업을 진행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교과서 자체를 아예 꺼내지 않거나 교과서를 덮고 수업하는 일이 더 많을 정도로 교과서 내용 외적인 부분의 수업을 많이 하셨다. 물론 수업 자체는 교과서 내용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쉽게 말해 교과서에서는 어떤 역사적인 사건과 문장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을 암기하는게 전부라면 이 선생님의 수업방식은 그런 한줄, 두줄의 설명이 아니라 1시간을 전부 투자해 우리가 몰랐던 것에 대해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지금 KBS에서 방영하는 [역사저널 오늘]과 같은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수업에 도입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이런 방식은 다른 선생님도 많이 하신다. 단지 그런 독특한 수업방식 때문에 이 선생님이 좋은 건 아니다. 이 선생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신문이다. 신문은 살아있는 교과서이자 생생한 삶의 원천이라며 신문보기를 수업에 도입하셨는데 그 선생님의 수업이 있는 날은 무조건 준비물로 신문을 준비해야 할 정도로 교과서를 꺼낸 시간보다 신문을 꺼낸 시간이 더 많고 수업시간 내내 신문을 본 시간이 더 많다. 재미있는건 떠들고 장난치던 아이들도 각자 준비한 신문을 꺼내 보면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는데 이런 열공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항상 흡족해 하신 선생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은 스포츠 신문과 연예관련 잡지등은 배제하셨지만 그것도 가이드라인일 뿐 규제사항은 아니어서 되도록이면 시사전문지를 보도록 유도하셨을 뿐 굳이 스포츠신문을 보겠다면 상관없다고 하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문에서 본 재미있는 내용들, 궁금한 이야기들, 알수없는 이야기들에 대해 일종의 토론수업이 있었던 건 당연한 일, 더군다나 선생님은 신문 스크랩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이 선생님의 영향으로 신문 스크랩이 나의 메인 취미가 되었을 정도로 내 인생에 큰 획을 그어준 선생님이다. 

 

 

 

 

선생님의 위상과 권위가 확연히 달라진 건 긍정적인 일보다 부정적인 일이 생겼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잘못을 저질러 파출소나 경찰서로 끌려가는 경우, 예외없이 경찰관은 학교가 어디냐부터 묻고 담임 선생님을 호출하는게 응당 당연한 업무였다. 그리고 항상 학생들이 경찰관서에 가면 부모님보다 먼저 오고 부모님 대신에서 학생들을 챙겼던 것이 선생님이다. 경찰도 부모보다 선생님을 부르는 걸 당연시 했었고 선생님도 당연시 했으며 부모조차도 당연시 했지만 지금은 경찰관서에 학생이 잡혀가면 경찰도 부모에게 먼저 연락하고 선생님은 왜 자기에게 연락하는지 의아해하고 부모는 자기가 먼저 가야하는걸 당연시 여기는 세상이 되었다.

 

 

청소년들에게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학생이 직업이다. 이건 선택한 직업이 아니라 숙명적인 관계로 부모에게 자녀가 있는것처럼 무조건 받아들어야 하는 직업이다. 이 직업의 주체는 선생님으로 가정에서는 부모가 보호자이지만 학교에 오거나 학생 신분으로 들어가면 선생님이 무조건 보호자 1순위다. 학교에서 아이가 잘못해서 매를 맞고 와도 부모님들이 아무소리 못하고 심지어 고맙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도 보호자로서의 역활을 충분히 해주고 있다고 여기는데, 지금은 그것을 단순히 폭력으로만 생각하고 그것만 보는게 차이점으로 뜬금없이 아무런 이유없이 폭력에 준하는 폭행이 아닌 이상, 가정에서의 부모 매질과 학교에서의 선생님 매질은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교육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 나이일수록, 고학력일수록 학교의 매질은 정당화할 수 없고 사람을 때리는 건 무식한 행동이며 그 어떤것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하지만 교육의 본질, 자아성찰의 본질을 오히려 망각한 잘못된 선입견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원초적이고 단순해서 때로는 매질이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으며 그 자체는 행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얻는것과 잃는것이 반드시 있는 행위라 그 매질 자체가 이루어진 건 양쪽 모두에게 고통이자 값진 경험으로 사랑의 매라는 그 이름하에서는 그건 단순히 매질로 보아서도 안되고 폭력이나 폭행으로 간주해서도 안된다.

 

 

부모나 선생님의 매질이 아주 나쁘고 저질스러운 악행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중 다수는 키우는 강아지가 조금만 잘못해도 설령 가벼운 터치라고 해도 손찌검을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인간도 동물이다. 다를게 없다. 정작 매질은 무조건 나쁘다고 하고서는 그런 사람들이 다른데서는 매질을 밥먹듯이 하고 의외로 많이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더 많은게 매질을 안좋게 보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아빠나 엄마 세대에서는 파출소에서 선생님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선생님이 먼저 달려야 챙겨주고 파출소에서 데리고 나가주는 것에 대해 꼽십어 생각해 봐야한다. 우리 자식들은 왜 그런 경험을 못하는지 왜 우리 선생님들은 학교 울타리만 벗어나면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학생들 앞에서 혹여 파출소에 갈 일이 생기면 부모님보다 선생님한테 먼저 연락하라고 하는 선생님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세상에서, 경찰들도 이제는 학생들의 보호자를 부를 때 선생님을 우선 생각지도 않고 선생님을 먼저 불러야 한다는것에 의아해 하는 세상이 되버렸지만 그래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학생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다면 선생님이 보호자로서의 선순위자고 그 시간 외적인 것과 신분이 아닌 경우에만 부모가 보호자다. 원래 이런 인식이 맞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은 항상 선생님을 어려워하고 고마워하며 감사의 대상으로 설령 선생님의 나이가 아주 어리고 젊더라도 아주 큰 어른으로 대접했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는 날이면 거드름 피우는 아버지도 안절부절하게 만든게 선생님이다. 그런 선생님의 위상과 권위가 떨어진 건 1차적으로 선생님들 스스로고 2차적으로는 부모들이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는가. 윗물이 흐린데 아랫물이 흐린건 당연한 법, 부모가 선생님을 무시하고 사회가 선생님을 무시하며, 선생님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능력이 떨어지고 싹수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걸 보고 자라는 아이들도 같이 무시하게 되는 법이지, 아이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선생님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훈장 선생님 옆에는 항상 회초리가 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게 여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교에서 선생님 옆에는 회초리가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회초리는 반드시 잘못했을 때만 나서지 잘하거나 아주 잘못이 없다면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잘못을 했다면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하는게 진리다. 그건이 회초리라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걸 부정하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보편적으로 확립되는 순간 잘못과 처벌은 이어질 수 없다. 학교에서의 선생님 회초리가 사라지면서, 설령 그것이 써도 폭력으로 간주해서 선생님을 고소하는 세상이 되면서 잘못을 했을때만 쓰는 회초리까지 부정하는 세상에서는 당연히 잘못을 인정하는게 어려워진다.

 

 

그래서 요즘에는 잘못을 해도 처벌받는게 이해하지 못하고 꼬리부터 자르기 쉽다. 내가 잘못했으면 혼이 나고 처벌을 받는게 당연하데 발뺌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학교에서부터 답습된 습성 때문이다. 회초리 든다고 고소하는 판국에 부모가 혼을 내도, 사회에서 잘못을 해도 순수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이나 사람들이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과거에는 파출소를 출입한 경험이 있는 아이들 대부분, 선생님이 달려와 경찰들 앞에서 대신 혼꾸녕을 내주고 데리고 나가서는 짜장면 한그릇 사주셨던 일이 훨씬 많다. 별것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데 이런 경우가 오히려 아이들 자리잡는데 더 효과적이고 아이들 입장에서도 더 고마워하면서도 제정신 차린 경우가 더 많다. 지금은 파출소에 부모가 먼저 달려와도 달라질 게 없다. 데리고 나가서 짜장면 한그릇, 밥부터 챙겨주는 미덕은 부모자식간에도 없고 뒷통수 후려치기 바쁘다. 요즘에는 그마저도 대든다고 때리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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