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우리 땅 녹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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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전통역사

잊혀진 우리 땅 녹둔도

by 깨알석사 2014.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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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우리 땅! 녹둔도 (흩어져 있는 다른 분들의 자료와 함께 작성한 글 입니다)

녹둔도(鹿屯島, 사슴섬)는 함경북도 선봉군(先鋒郡) 조산리(造山里)에서 약 4㎞ 거리에 있는 섬이다. 과거의 우리 땅 이었으나 지금은 러시아의 국경도시 하산에 속해 있다. 지형변화로 ‘섬 아닌 섬’이 되어 있다. 녹둔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세종대왕 4군6진 개척때 편입) 사차마도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녹둔도라는 이름을 얻는 것은 세조 원년인 1445년. 이후 만들어진 대부분의 고지도는 녹둔도를 명기하고 있다. 청(淸)나라와 일제가 만든 지도와 기록도 마찬가지, 녹둔도의 크기는 고지도마다 다르지만 19세기말 조선에서 편찬된 아국여지도의 녹둔도는 무려 남북 70리, 동서 30리에 이른다. 면적이 300km²가 넘는 셈.

반면 1901년 일제가 펴낸 조선개화사는 녹둔도의 면적을 4km² 정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실제 면적은 32km²로 정도로 여의도의 4배정도 크기라고 한다. 조선말기에도 지형변화로 연해주와 붙어버리긴 했지만 녹둔도는 여전히 조선의 땅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청나라를 압박해 1860년 베이징(北京)조약을 체결하면서 녹둔도의 운명이 바뀌었다

러시아가 슬그머니 녹둔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킨 것. 조선은 뒤늦게 1885년 청나라와 러시아에 3국의 공동 감계안(勘界案)을 제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한인들이 거주하였으나 1990년 북한이 옛 소련과 국경조약을 체결했면서 과거의 베이징조약을 그대로 이어 받아 북한은 녹둔도가 결국 러시아의 영토임을 공식 인정해준 셈이 되었다.

67년 전에 멈춰선 녹둔도 시계

녹둔도는 가을엔 무성한 갈대숲이, 여름엔 습지성 식물이 주인노릇을 하는 곳이다. 1937년 옛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이곳에 살던 한인(韓人)들이 중앙아시아로 쫓겨 가면서 이곳은 하루아침에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녹둔도엔 지금도 망국의 한이 서린 한인들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녹둔토성 추정지 부근엔 밭이랑이 뚜렷하고 주인을 잃은 집터와 연자방아가 곳곳에 널려 있다. 가마솥 놋그릇 항아리 파편들도 눈에 들어온다. 즉, 녹둔도의 시계는 아직도 67년 전에 멈춰 있는 것이다.

충무공의 자취가 서린 녹둔도 

녹둔도는 조선 초 세종의 6진 개척 때 우리 영토로 편입되었다. 세조는 여진족들의 약탈을 우려해 국경수비군에게 엄중 방비하라는 영을 내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 여진족들이 대거 침입, 조선 군사 11명이 살해되고 백성 160여명이 납치된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의 책임으로 충무공 이순신은 조산만호직을 박탈당한다. 조선은 이듬해 반격에 나선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에 백의종군해 승리를 이끈 공로로 사면을 받았다. 녹둔도는 조선시대 초부터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때까지 한인들의 생활 근거지였다. 지금은 육지와 붙은 녹둔도 추정지 곳곳에서 연자맷돌과 집터 등 한인들의 생활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러시아는 옛 녹둔도 주변의 두만강 하구를 군사지역으로 정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지형변화로 "섬 아닌 섬"

두만강의 잦은 범람과 이로 인한 토사의 퇴적으로 녹둔도 북쪽의 물줄기가 차츰 가늘어져 언제부터인가 녹둔도와 연해주가 이어졌다. 동해의 수위 변화도 두만강 수로 변화의 한 요인이 됐다고 한다. 1709년 청나라 강희제의 지시로 만든 지도에 이미 녹둔도와 연해주는 붙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고 따라서 15세기 당시 녹둔도의 위치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최근 발견된 녹둔토성 추정지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높이 6∼7m, 길이 4km의 토축물은 함경도 조산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다. 따라서 녹둔도와 연해주를 갈랐을 두만강 지류(일명 녹둔강)의 위치도 추정할 수 있다. 지형변화로 연해주와 붙어버리긴 했지만 녹둔도는 여전히 조선의 땅이었다. 베이징조약 체결 이후에도 녹둔도는 엄연히 조선사람들의 땅이었다. 1883년 어윤중 서북경략사는 “녹둔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선사람들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 명도 없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고종은 또 김광훈과 신선욱을 밀사로 파견해 녹둔도 현황을 파악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들은 녹둔도에 113가구, 822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내용을 아국여지도를 새겨 넣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선 녹둔도는 나라 잃은 한인들의 근거지였다. 독립운동가 신필수가 1921년 옛 녹둔도인 녹동에 머물면서 남긴 일기에는 한인마을이 40가구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북한이 재확인한 ‘녹둔도 비극’

일본 외교문서에는 조선 조정이 줄기차게 녹둔도의 반환을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0년 옛 소련과 국경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조약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 북한은 결국 녹둔도가 러시아의 영토임을 공식 인정해준 셈이 되었다.



동아닷컴 [우리땅 우리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10> 잊혀진 섬 녹둔도

http://news.donga.com/3//20040610/8070989/1 (원문 기사 - 더 자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북한-중국-러시아의 국경이 접하는 러시아 최남단 도시 하산. 낯선 동양인이 역에 내리자 국경수비대원들이 사무실로 연행해 여권을 확인하고 방문목적을 묻는다. “관광”이라고 대답하자 그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별 일도 다 있다는 표정이다. “군사시설이 있기 때문에 관광객도 사진 촬영은 안돼요.” 통역을 맡은 고려인 A씨가 거듭 주의를 준다. 마침 하산역을 출발해 두만강 철교(조-러 친선교)를 건너는 열차가 눈에 들어온다. 일주일에 두 차례 북한과 러시아를 오가는 열차라고 한다.》

●67년 전에 멈춰선 녹둔도 시계

하산역에서 남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A씨가 긴장한다. “더 이상 들어가면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녹둔도(鹿屯島)로 들어가는 소로를 가리켰다. 취재기간 중 만난 러시아과학원 태평양지리연구소 세르게이 간지 부소장은 “우리도 두만강 하구로 들어가는 허가를 받으려면 꼬박 두 달이 걸린다”고 했다.

녹둔도는 가을엔 무성한 갈대숲이, 여름엔 습지성 식물이 주인노릇을 할 뿐이다. 1937년 옛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이곳에 살던 한인(韓人)들이 중앙아시아로 쫓겨 가면서 이곳은 하루아침에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녹둔도엔 지금도 망국의 한이 서린 한인들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녹둔토성 추정지 부근엔 밭이랑이 뚜렷하고 주인을 잃은 집터와 연자방아가 곳곳에 널려 있다. 가마솥 놋그릇 항아리 파편들도 눈에 띈다. 녹둔도의 시계는 아직도 67년 전에 멈춰 있다.

●여의도의 4배가량 되는 녹둔도

녹둔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사차마도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녹둔도라는 이름을 얻는 것은 세조 원년인 1445년. 이후 만들어진 대부분의 고지도는 녹둔도를 명기하고 있다. 청(淸)나라와 일제가 만든 지도와 기록도 마찬가지다.

녹둔도의 크기는 고지도마다 다르다. 19세기말 조선에서 편찬된 아국여지도의 녹둔도는 무려 남북 70리, 동서 30리에 이른다. 면적이 300km²가 넘는 셈. 반면 1901년 일제가 펴낸 조선개화사는 녹둔도의 면적을 4km² 정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팀을 이끌고 5차례 녹둔도를 현지 답사한 서울대 이기석 교수는 녹둔도의 면적을 32km²로 정도로 추정했다.

●충무공의 자취가 서린 녹둔도

녹둔도는 조선 초 세종의 6진 개척 때 우리 영토로 편입됐다. 세조는 여진족들의 약탈을 우려해 국경수비군에게 엄중 방비하라는 영을 내리기도 한다. 여진족과의 긴장관계는 ‘녹둔도 사건’으로 비화한다.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 여진족들이 대거 침입한 것이다.

조선 군사 11명이 살해되고 백성 160여명이 납치된 책임을 지고 충무공 이순신은 조산만호직을 박탈당한다. 조선은 이듬해 반격에 나선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 백의종군해 승리를 이끈 공로로 사면을 받는다.

녹둔도는 그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 시기는 청나라와 조선이 접경지역을 무인지대(無人地帶)로 봉금했던 때와 일치한다. 하지만 노계현 전 방송통신대 교수는 “그 시기에도 녹둔도가 조선의 영토였던 것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녹둔도는 조선시대 초부터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때까지 한인들의 생활 근거지였다. 지금은 육지와 붙은 녹둔도 추정지 곳곳에서 연자맷돌과 집터 등 한인들의 생활 흔적이 발견된다. 러시아는 옛 녹둔도 주변의 두만강 하구를 군사지역으로 정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사진제공 두만강토지이용연구팀

●지형변화로 ‘섬 아닌 섬’이 되다

문제는 두만강의 잦은 범람으로 인한 토사의 퇴적으로 녹둔도 북쪽의 물줄기가 차츰 가늘어져 언제부터인가 녹둔도와 연해주가 이어진 것. 동해의 수위 변화도 두만강 수로 변화의 한 요인이 됐다.

1709년 청나라 강희제의 지시로 만든 지도에 이미 녹둔도와 연해주는 붙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잇다. 고종 때 제작된 듯한 경흥읍지의 녹둔도도 그렇게 돼 있다. 따라서 15세기 당시 녹둔도의 위치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최근 발견된 녹둔토성 추정지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높이 6∼7m, 길이 4km의 토축물은 함경도 조산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에 따라 녹둔도와 연해주를 갈랐을 두만강 지류(일명 녹둔강)의 위치도 추정할 수 있게 됐다. 이기석 교수는 “녹둔도 추정지에서 둔전을 설치할 수 있을 만큼의 넓은 경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淸 원세개 “淸-러조약 불합리” 인정

지형변화로 연해주와 붙어버리긴 했지만 녹둔도는 여전히 조선의 땅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청나라를 압박해 1860년 베이징(北京)조약을 체결하면서 녹둔도의 운명이 바뀌었다. 러시아가 슬그머니 녹둔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킨 것이다.

당시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의 대응은 미미했다. 양태진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장은 “조선은 러시아와 청나라가 두만강 하구에 국경표석을 세운 의미를 확실히 알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조선은 뒤늦게 1885년 청나라와 러시아에 3국의 공동 감계안(勘界案)을 제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야심과 청나라의 무성의에 조선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청국관리의 지리적 미숙으로 불합리한 약서를 만들어 조선에 탄식을 끼치게 했다.” 원세개 청나라 공사의 이 말은 조선의 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녹둔도는 조선사람 땅

베이징조약 체결 이후에도 녹둔도는 엄연히 조선사람들의 땅이었다. 1883년 어윤중 서북경략사는 “녹둔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선사람들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 명도 없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고종은 또 김광훈과 신선욱을 밀사로 파견해 녹둔도 현황을 파악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들은 녹둔도에 113가구, 822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내용을 아국여지도를 새겨 넣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선 녹둔도는 나라 잃은 한인들의 근거지였다. 독립운동가 신필수가 1921년 옛 녹둔도인 녹동에 머물면서 남긴 일기에는 한인마을이 40가구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세르게이 간지 부소장은 “1930년대까지 녹둔도를 포함한 연해주에 한인 7만여명이 거주했다”고 말했다.

● 북한이 재확인한 ‘녹둔도 비극’

일본 외교문서에는 조선 조정이 줄기차게 녹둔도의 반환을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 양태진 소장은 “조선이 러시아와 청나라의 국경획정을 수용하지 않았으므로 한-러 간에는 공식적인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0년 옛 소련과 국경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조약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북한은 결국 녹둔도가 러시아의 영토임을 공식 인정해준 셈이다.

하산=특별취재팀



엠파스 백과사전 "녹둔도"

두만강 하류 조산(造山) 부근에 있었던 하천도서.

섬 둘레는 2리(里) 정도이고 높이는 수면에서 10자〔尺〕 되는 작은 섬이다. 산물은 보리·밀·수수와 각종 어류 및 청백염(靑白鹽)이다. 육진개척 이후 국경 하천이 된 두만강의 하천도서였으므로, 그 건너편 지역에 살던 여진족들이 물자가 궁핍하면 그 때마다 녹둔도에 잠입해 자주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이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가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에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원래 사토로 이루어진 이 섬이 농경지가 되기까지에는 많은 고난과 시일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농민들이 녹둔도에 상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春耕秋收期)에 한해 주로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곳에 출입하였다.

선조 때에는 출입의 번거로움을 덜고, 방수(防戍)를 강화하기 위해서 녹둔도에 둔전(屯田)을 실시하자는 의견이 자주 나오기도 하였다. 이 섬에서 농작물이 생산된 뒤에는 여러 여진부족들이 생활 물자를 구하기 위해 자주 이 섬을 침입, 약탈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는 1587년(선조 20) 9월에 발생한 사건 때였다. 이 때 여진 시전부족(時錢部族)이 녹둔도에 몰래 침입해 방비하던 수호장(守護將) 오형(吳亨), 감관(監官) 임경번(林景藩) 등 11명의 군사를 살해하고 군민(軍民) 160여명을 납치해 갔으며 말 15필을 약탈해 간 것이었다. 그 뒤 조정에서는 여진족에 대해 강경정책으로 대처하면서 영토수호 의지를 천명하였다.

녹둔도는 1800년대 이후 강 상류의 모래가 유속(流速)에 밀려 내려와 녹둔도와 그 대안(對岸) 사이에 퇴적됨에 따라 연륙(連陸)되어 갔다. 확실한 연륙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의 결과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지역이었던 녹둔도가 조선·청·러시아 3국간의 국경지역으로 되었다.

1882년 1월 고종은 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삼고 녹둔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할 방략을 모색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와 국교가 열리자 러시아 공사에게 이 섬의 반환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또 고종은 김광훈(金光薰)·신선욱(申先郁)을 현지로 보내어 녹둔도 관계 지도를 작성하게 하였다. 이 지도는 〈아국여지도 我國輿地圖〉라는 이름으로 녹둔도의 지리적 상황을 자세하게 나타내었다. 이에 따르면 민가는 113호에 인구 822명이 우리 풍속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섬은 우리 영토로 유서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나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러시아로 넘어갔으며 오늘날까지 귀속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미수복 영토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地理志
≪참고문헌≫ 宣祖實錄
≪참고문헌≫ 大東輿地圖
≪참고문헌≫ 慶興府邑誌
≪참고문헌≫ 俄國輿地圖(柳永博, 國學資料 創刊號, 1972)
≪참고문헌≫ 朝鮮·俄羅斯關係五十年(柳永博, 高大文化 15, 1974)
≪참고문헌≫ 鹿屯島의 歸屬問題(柳永博, 學術院論文集 15, 1976)
≪참고문헌≫ 鹿屯島의 連陸過程과 國際紛爭의 未決遺産(柳永博, 震檀學報 44, 1978)
≪참고문헌≫ 鹿屯島問題의 國際化와 日本介入의 眞意(柳永博, 學術院論文集 17, 1978)
≪참고문헌≫ 江左輿地記論巧(柳永博, 國學資料 38, 1980)

우리땅 녹둔도를 잊었는가! 엉겹결에 잃은 땅

우리땅 녹둔도는 1860년 철종 11년 `엉겹결'에 러시아 땅으로 편입되어 버렸다. 영국 프랑스와 청나라간 벌어진 아편전쟁을 러시아가 중재하면서 그 대가로 청나라는 러시아에 연해주 700리라는 광활한 영토를 내준다. 그때 연해주 끄트머리에 있던 우리땅 녹둔도도 딸려들어갔다. 섬이었던 녹둔도는 이때 이미 홍수로 인해 토사가 쌓여 연해주로 육지화 되어 있었다.

이때 잃은 녹둔도는 고종 때 찾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고종은 1882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에게 녹둔도 실사를 명하였다. 그리고 1889년에는 청국의 심계(審界)위원회 오대징에게 국 경계(國 境界)를 재심하여 녹둔도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대징은 이를 묵살했다.

녹둔도에 대한 기록은 일본의 문서에도 보인다. 1890년 일본 영사 立田革이 일 외무성에 보고한 비밀문서에 "녹둔도는 한국령으로 한국 정부가 러시아 공사에게 섬의 반환을 요구했고, 러시아 공사도 이 문제를 본국 정부에 보고하여 알려주겠다고 한 바 있으나 아직 통보는 없는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한은 녹둔도 귀속문제 러에 제기해야

그러나 이후 녹둔도에 대한 국토회복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물론 현재 정부도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눈에 보이는 활동은 전무한 상태이다. 다만 이형석 소장 혼자서 연구를 통해, 또 對 정부 탄원서를 통해 녹둔도 반환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는 노태우 정권 때 고르바초프가 제주도를 방문하자 노태우 내통령에게 녹둔도 반환을 요구해야 한다는 탄원서를 보냈다. 이후 옐친 대통령에게도 같은 탄원서를 보낸 바 있다. 한국과 러시아는 언젠가 이 땅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녹둔도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정부도 북한이 러시아측에 정식 문제 제기를 하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1937년 소련은 극동의 연해주에 있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하였다. 1925년 25만명이던 한인들은 강제 추방 이후 18만명으로 줄어 7­8만이 행방불명되었지만 여기에 대한 진상 조사도 없었다. 또한 이후 소련의 6.25 참전,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 있었던 것을 이형석 박사는 남달리 보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녹둔도 반환을 염두에 둔 장기적이고 신경질적인 러시아의 대비책이 아니었을까 하는 혐의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는 1988년 하천 연구소를 설립해 지금까지 백두산 7번 중국은 14차례나 방문하였다 . 중국·러시아·북한의 국경선비인 토자비(패).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2km 지점에 녹둔도가 위치하고 있다. 녹둔도 답사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녹둔도에 대한 국경분쟁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인지 외국인의 접근은 일절 금하고 있었다. 다만 북한 . 중국 . 러시아의 국경선이 있는 방천(防川)을 어렵사리 방문해 그 곳에 서 있는 토자패(土字牌) 앞에 서서 저 멀리에 있는 녹둔도를 짐작해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토자패가 방천에 서 있는 것은 바로 녹둔도가 우리 땅이라는 방증의 하나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경은 강을 경계로 하여 정해지는데 토자패가 방천에 위치한 것은 녹둔도가 우리땅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이형석 선생은 녹둔도가 우리땅인 것은 간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명확한 것이다고 말했다. 간도가 우리 땅으로 표시된 고지도는 전무하지만 녹둔도는 분명한 우리 땅이었고 그것은 각종 문헌에서도 나오고 있으며, 그 땅을 청나라가 부당하게 러시아에 넘겼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슴섬 녹둔도>섬의 크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아국동국여지도에 의하면 `남북 70리 동서 30리'라고 되어 있다. 남북으로 28킬로미터, 동서로 12킬로미터 정도이니, 여의도에 비교할 바 아닌 큰 섬이다. 녹둔도는 다산 정약용의 「대동수경」에 사차마도(沙次麻島)라고 했다. 사차마(沙次麻)는 사슴이라는 뜻의 그 지방 방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사차마도로, 1861년 대동여지도에는 녹둔도로 표기되었다



-월간아리랑-

이형석(李炯石. 63) 선생은 교육학 박사, 인천 땅이름 연구회, 가천문화재단 문화부장 등 여러 직함과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천연구에 일생을 건 최초이자 유일한 전문가'라는 말로 통한다. 하천에 따른 그에 대한 칭호도 '강박사', 그 중에서 강의 발원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강뿌리 박사', 모든 강들을 직접 답사하여 '현대판 김정호'란 별명이 붙어 있다. 그에게 국경하천 압록 . 두만강 그리고 두만강 하구에 자리잡은, 지금은 부당하게 러시아에 넘어가 있는 땅 녹둔도는 그의 연구영역이기도 하다.


네이버 백과사전 "녹둔도"

함경북도 선봉군(先鋒郡) 조산리(造山里)에서 약 4㎞ 거리에 있는 섬. 함북 선봉군 조산리에서 약 4㎞ 거리

둘레 약 8㎞이다. 1800년대 이후 두만강 상류의 모래가 유속()에 밀려 내려와 녹둔도와 그 대안() 사이에 퇴적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현재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1990년 무렵에는 100호의 인가가 있어 벼·조·옥수수·보리 등이 재배되었고, 주변에서는 연어·붕어·황어·숭어 등이 주로 잡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세종 때 6진()을 개척한 이래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은 상주가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에 한해서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그러던 중 1587년(선조 20) 여진족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해, 당시 책임자였던 조산만호() 이순신()이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된 바 있다.

그뒤 1860년(철종 11) 청()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 체결로 러시아 영토가 되어버린 것을 1889년(고종 26)에야 비로소 알고 청나라측에 항의, 이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84년 11월 북한과 소련 당국자 간에 평양에서 국경문제에 관한 회담을 열어 관심을 끌었으나 미해결인 채로 끝났으며, 1990년에는 직접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에게 섬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잊혀진 우리 땅 녹둔도, 세종대왕이 개척했고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섬 아닌 섬에서 수군 전략을 경험하고 그걸 토대로 왜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모두 광화문 광장에 있는 대한민국 영웅으로 녹둔도는 두 분과도 인연이 매우 깊은 독도만큼 중요한 우리 땅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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