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이의 공양미 300석은 현재 가치로 얼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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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금융상식

심청이의 공양미 300석은 현재 가치로 얼마일까?

by 깨알석사 2023.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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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면 되겠니?

우리나라에서 부피를 재는 옛날 단위로 '홉'이라는 것이 있다. 세수를 할 때처럼 양 손바닥을 모아 그 손바닥 안에 최대한 많이 담을 수 있는 양을 "홉"의 기준으로 삼았다. 정확한 계량이 아닌 만큼 이 단위는 현재 잘 쓰이지 않지만 소주 2홉짜리(두홉들이) 한 병이라는 식으로 이 단위가 가끔 쓰일 때도 있다. 1홉은 180ml에 해당하는데 소주 한 병을 보통 2홉이라 하니 소주는 360ml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실제로 소주병 뒷면에 적힌 소주 1병의 용량을 보면 360ml (처음처럼, 참이슬 등) 표기가 되어 있어 2홉짜리 한 병이라는 말은 지금 소주에도 성립 가능한 말이다. 흔히 보는 종이컵이 200ml 사이즈로 나온다. 한 홉 정도 양을 부으면 넘치기 직전까지 물이 차는 걸 알 수 있는데 1홉은 180ml이니 종이컵에 흔히 가득 담았을 때의 양이 이 홉의 양으로 보면 된다. 쉽게 접하는 우유팩 1개 정도와 얼추 비슷하다 (200ml 우유 기준)

지금도 시장에서 통용되는 '되'는 현대적인 계량법이 도입되면서 홉과 마찬가지로 쓰지 못하게 되었지만 쟁여두고 자주 썼던 단위였던 만큼 전통 식품 등 (간장, 참기름 등)에서는 홉처럼 종종 쓰일 때가 있다. 여기서 되는 홉의 10배를 말한다. 1홉이 180ml를 의미하니 그것의 10배인 1되는 1.8L에 해당한다. 지금은 1.5L PT병이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데 간장이나 참기름 등 예전부터 썼던 제품들은 1.5L가 아닌 한 되에 해당하는 1.8L를 주로 썼기 때문에 지금도 이런 제품들은 대부분 1.8L짜리 제품들이 나온다. 생수병처럼 생기지 않고 병에 구멍이 뚫려 있어 손잡이가 있는 PT병 제품들처럼 (아래 사진) 식용유, 간장, 맛술(미림) 등에 1.5L가 아닌 1.8L 사이즈가 유독 많은 것도 그런 이유. 저렇게 손잡이가 있는 제품들이 대부분 1.8리터짜리들이고 이게 한 되 사이즈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어르신들이 여전히 쓰는 '한 말'이라는 건 1.8L가 되는 한 되의 10배를 의미한다. 지금 부피 기준으로는 18L가 한 된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말통이라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튀김집 (치킨집)에서 쓰는 네모진 사각통의 큰 식용유 1통, 식초나 세제, 락스 등 네모 사각진 큰 말통이 18L이기에 여기에 해당한다.

홉의 10배가 되이고 되의 10배가 말인데 이 1말의 10배가 오늘의 주제인 공양미 300석(섬)의 "석(섬)"이 된다. 석과 섬은 같은 말로 석이라 해도 되고 섬이라 해도 된다. 석은 한자이고 섬은 우리말이다. 그래서 누군 공양미 300석이라 하고 누구는 공양미 300섬이라 하기도 하는데 뭘로 말해도 상관이 없다. 달걀과(우리말) 계란처럼(한자) 같은 말이다. 여기서 1말이 18L라 했으니 석(섬)은 그것의 10배인 180L를 의미한다. 쌀을 무게가 아닌 부피로 계산하기 때문에 헷갈려 할 수 있는데 석은 무게가 아닌 180L 용기에 담긴 곡물을 의미하기 때문에 1석(섬)은 무게가 아닌 180L 부피에 해당하는 곡물의 양으로 보아야 한다.

참고로 지금은 홉, 되, 말이 흔히 쓰는 단위는 아니지만 우리 주위를 보면 이 단위는 우리가 일찍부터 익숙하게 썼던 용량이라 우리 주변에서도 그대로 그와 비슷한 용량으로 만들어져 판매되는 게 보통이다. 종이컵은 왜 모두 그 사이즈인지, 우유팩 작은 건 왜 그 용량으로 정해졌으며 식용유는 왜 유독 손잡이까지 만들며 크게 만드는지 모를 수 있다. 말통은 하나같이 모두 18L가 주로 통용되는데 그건 모두 홉, 되, 말의 용량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물론 이 단위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으로도 여전히 쓰인다. 요즘 말로 해석하면 1.8리터를 주고 18리터를 받는다는 뜻으로 개이득 상황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반대다. 내가 나쁜 짓을 했는데 그 10배로 나쁜 짓을 돌려받는다는 뜻으로 못된 짓을 했을 때 쓰는 말이다.

심청이가 받은 공양미 300석(섬)의 가치

본론으로 들어가 심청이가 받은 공양미 300석의 가치에 있어 그 기준이 되는 "석(섬)"의 크기를 알았으니 이제 이를 환산해 심청이가 받은 공양미가 얼마의 가치를 갖는지 알아보자. 이때 우선 고려해야 할 건 현재의 쌀 가격과 연동해 계산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일텐데 사실 여기에는 변수가 있어 이는 충분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심청이가 받은 쌀의 당시 가치와 지금 쌀의 가치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앞뒤 따지지 않고 쌀의 가치만 놓고 본다면 계산은 분명 쉬우나 우리가 먹는 쌀은 소비가 줄어들면서 예전과 같은 값어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부의 척도로 삼는 기준에는 상당히 미흡한 구석이 있다.

60년대 쌀 한 가마니의 가치와 2020년대 쌀 한 가마니의 가치가 다르다는 걸 지금도 잘 알고 있는데 지금 쌀 가격을 기준으로 1960년대 물가를 계산한다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 것처럼 당시의 쌀은 식량이면서도 소비재이고 화폐 역할을 했기 때문에 쌀이 갖는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일례로 소고기 값만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남미나 호주에서는 절반 이하의 값으로 사 먹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그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사 먹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소 혹은 소고기의 값을 기준을 어디에 두고 계산하는가에 따라 가치 평가는 확연하게 달라지고 크게 바뀔 여지가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현재 가격으로 당시 기준으로 환산해 계산하는 건 정확하다고 볼 순 없다.

무엇보다 석(섬)의 기준은 180L 용기에 담긴 곡물의 양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반대로 곡물마다(쌀, 콩, 보리, 조 등) 곡물 비중과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 계산이 되지 않는다. 무게로 따지면 같은 180L 용기라 해도 쌀은 더 많이 들어가고 콩은 쌀보다 더 적게 들어가기 때문에 쌀에만 적용된 단위가 아니어서 쌀 1섬과 보리 1섬, 콩 1섬은 모두 같은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무게 차이가 크게 난다. 쌀 1석(섬)은 2 가마니 정도가 되는데 쌀 한 가마니가 80kg이니 1석(섬)은 160킬로에 해당하지만 보리와 콩은 쌀보다 무게가 적게 나가기 때문에 그보다 적은 150kg대 무게가 나와 1석 기준으로 놓고 보면 5~10킬로까지 차이가 나기 때문에 300석이 되면 최대 0.5톤에서 최대 1톤까지 무게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300석(=600가마니) 화폐 가치로 보아도 예전 쌀 한 가마니는 크게 느껴졌고 큰돈처럼 여겼지만 지금의 쌀 한 가마니는 별로 감흥을 느끼기 어려운 금액으로 여긴다. 2023년 기준으로 봐도 쌀 한 가마니 시세는 대략 18만 원대, 정부미(나랏미)가 아닌 고급 쌀을 기준으로 해도 가격 차이는 2~3만 원 차이라 비싸야 20만 원이 최대치에 가깝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서는 쌀 한 가마니가 엄청 컸지만 지금은 애들 용돈 수준이라 가치가 다르다. 지금은 수많은 기술 개발과 농업 발전으로 벼 품종 개량도 진행이 되었고 수확량도 늘었다는 것 역시 당시 쌀과 생태 환경이 다르며 무엇보다 당시에는 화폐 가치를 넘어 필수품이 쌀이었다면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 창고에 쌓아두고 골치를 겪을 정도로 쌀의 가치가 무척 낮기 때문에 같은 쌀이라 해도 단순 비교는 어렵다. 

그럼에도 만약 현재 한 가마니 시세를 기준으로 해서 계산한다면 심청이는 600가마니 정도를 받은 것으로 대략 유추할 수 있기 때문에 2023년 기준으로 최대치 가격 20만 원을 잡고 계산하면 지금 가치로 약 1억 2천만 원을 받은 것으로 계산은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쌀이 푸대접받는 지금 기준으로도 1억 2천은 적지 않은 돈이기에 당시에는 이보다 몇 배 이상의 가치를 더 갖고 있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는데 물가와 생활 수준이 전혀 다른 환경이었기 때문에 최소 5배, 최대 10배 이상은 더 가치를 부여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쌀 가격과 화폐

우리는 쌀을 살 때 돈을 주고 산다. 분명 심청이 시대에도 쌀을 돈 주고 샀을 것이다. 물물교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도 화폐는 있었기 때문에 분명 이들도 쌀을 돈 주고 샀을 확률이 매우 높다. 말 한마디면 1000냥 빚도 갚는다란 속담처럼 1냥, 옆전(땡전도 없다), 1푼 (한푼줍쇼) 할 때의 그 당시 화폐들 말이다. 앞서 홉, 되, 말의 부피 용량처럼 화폐 단위 역시 같은 구조를 갖는다. 1냥은 10전이며 1전은 10푼이다. 1푼의 10배가 1전이고 1전의 10배가 1냥이다. 100푼이 1냥이라는 뜻이다. 보통 1푼이 엽전 1닢을 말한다. 사극 드라마 등에서 엽전을 여러 개 엮어 둥글게 말아 쥔 돈이 가끔 나오는데 되게 많아 보이지만 그 전부가 1냥일 수 있는 것이다. 고로 1냥은 상당히 큰 금액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때 이 1냥의 가치(가격)를 현재 화폐로 (원 단위) 환산을 한다면 당시 쌀과 지금 쌀 가격을 비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화폐 가치 역시 다르고 외국환율처럼 정확하게 환산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역시 정확성이 떨어진다. 당시 1냥이 지금 돈 얼마인지도 알 수 없다. 이때 추론해 볼 수 있는 건 그 당시 1냥으로 무얼 살 수 있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조선시대 기록물에 따르면 쌀 1석은 5냥 정도에서 거래된 것으로 나온다. 쌀 1석은 두 가마니에 해당하니 가마니 하나가 2냥 5전이라는 계산이 된다. 이걸 지금 한 가마니 시세 20만원으로 환산해 2냥 5전이 20만 원의 가치를 갖는다고 계산하고 600 가마로 환산하면 쌀 가격 비교한 금액과 다를 게 없기 때문에 이 계산은 의미가 없다. 다만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을 쌀이 아닌 당시 화폐 현금으로 받았다면 1,500냥을 받았다는 건 알 수 있다. 1,500냥이 300석의 가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당시 물가를 알 수 있는 다른 자료를 보면 말 1필이 600냥 정도이고 노비는 150냥, 소 한 마리는 500냥에 거래되었다고 나온다. 이를 그대로 대입해 재환산 하면 심청이는 1,500냥을 받은 것과 같으니 말 3마리 혹은 소 3마리를 살 수 있는 금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현재 소 한 마리 가격을 높게 잡아도 1천만 원 정도 나오기 때문에 (송아지 1마리 가격은 500만 원대) 지금 소값 기준으로 소 3마리 값이면 심청이는 3천만 원을 받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현재 쌀값을 기준으로 쌀로 계산할 때는 1억 2천이지만 현재 소값을 기준으로 하면 3천만 원이라 받은 가치의 가격 산정에 괴리감이 무척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역시 당시에는 소가 무척 귀하고 잡아 먹을 수도 없으며 농사에 필수적이라 거의 집값과 맞먹는 가격대라는 걸 감안하지 않은 계산이기 때문에 이 계산은 정확할 수 없다. 당시의 소는 일반 서민이 쉽게 살 수 없는 엄청난 부의 척도였는데 지금은 소값이 대학생 1년 학비 수준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부의 척도에서도 거리가 멀다. 당시 소 3마리 값이면 분명 엄청난 값이라는 걸 짐작으로 아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별거 아니기 때문에 심청이가 받은 공양미의 가격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게 된다. 결국 쌀로 받았냐 돈으로 받았냐 가축으로 받았냐에 따라 지금 기준을 제각각 적용하면 가치가 많이 틀어질 수밖에 없어 정확한 유추가 어렵다.

절대지존 부동산

이때 그나마 가장 근접하게 접근해 계산해 볼 수 있는 건 바로 부동산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 집 없이 산 다는 건 서러운 일이고 집이 있어야 살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집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 요소다. 즉 심청이가 받은 몸값을 계산하는데 있어 물품 거래대금 혹은 물건 값으로 환산하지 말고 당시의 생활 수준과 환경을 고려해 거주지라는 "공간"을 대입해 그 공간이 갖는 값어치, 즉 부동산의 시세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보는데 1930년대나 1970년대나 2000년대나 부동산 가격 시세 역시 늘 변하고 바뀌었지만 그 공간이 갖는 상징성과 부의 척도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간을 살 수 있는 값어치를 대입해 계산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고 다른 기준을 삼자는 것이다. (지금도 돈이 생기면 대부분 집부터 사려는 습성과 같다)

심청이가 활동했던 시기는 대략 1200년대로 당시 부동산 가격을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이 없지만 조선시대 다른 시기의 집값 시세를 감안해 시세를 추려보면 대략 기와집은 200냥, 초가집은(초가삼간) 10냥 정도면 살 수 있는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데 지금처럼 부동산 투기가 있거나 재테크 차원에서 집을 사는 경우는 없고 모두가 실거주 목적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집 값 자체는 기와집이 아닌 이상 생각보다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와집도 크기가 다르고 초가집도 마찬가지로 제각각이니 천편일률적으로 시세가 동일하지는 않았겠지만 대략 사는 게 다 비슷하고 신분 상승이 어렵고 계층 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걸 감안하면 시세 변동은 백 년 단위로 조금씩 상승했을 뿐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라 보여 대충 초가집은 10냥대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전제를 깔고 계산을 해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심청이가 받은 쌀, 혹은 그 쌀을 돈으로 바꿔 1,500냥을 가졌다고 할 경우 심청이는 기와집을 7채 가질 수 있었다는 계산이 되고 서민층이 사는 초가집으로 따지면 150채 정도를 가질 수 있었다는 계산이 된다. 물론 이때의 초가집도 초가삼간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삼간으로 이루어진 가난을 대변하는 거주만 가능한 모양만 집인 경우도 있지만 기억자 형태로 꺽이면서 싸리재로 엮은 담장까지 만들 정도의 초가집도 있었기 때문에 좀 여유가 있는 초가집으로 대입해도 100채 정도는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지금 집(공간)으로 환산하면 조선시대 서민들이 사는 공간임을 감안해 현실적으로 가난과는 좀 거리가 있는 구옥주택(단독주택)은 제외하고 현실적으로 평당 100~300 사이에 있는 구축빌라 (30년 넘은 예전 빌라/수도권 기준)를 초가집으로 보고 기와집은 힐스테이트나 푸르지오 등의 중대형 고급 아파트로 봤을 경우 현재 심청이가 받은 몸값의 가치는 중대형 고급 아파트 7채 정도 혹은 구축빌라 100채 정도를 받았다고 가늠해 볼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 집값 자체는 변해도 집이 갖는 상징성과 함께 물가 자체가 집 시세와 함께 움직이면서 당시 시대상을 크게 반영하는 것이 집이기 때문에 현재 기준으로 심청이가 받은 공양미 300석의 가치는 집으로 환산했을 경우 이 정도의 금전적 가치를 받았지 않았나 하는 결론이 나온다.

이를 다시 지금 화페 기준으로 바꾸면 서울(한양) 30평대 아파트 1채를 평균 10억 원으로 잡는 경우 70억 원을 받은 것이고 10평대 구축빌라를 150채 받았다고 할 경우 대략 6천만 원대로 시세가 형성되니 90억 원 정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 둘의 중간 평균이 80억이니 전체적으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약 80억 원을 받고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제물로 몸을 바쳤다는 계산이 된다.

정리하면

쌀 1석은 5냥이고 쌀 300석이면 1,500냥에 해당한다. 이 돈이면 10명의 노비 값에 해당하며 한양을 기준으로 기와집을 5채 살 수 있는데 심청이는 1200년대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시세가 더 낮았을 것이라는 걸 감안하면 7채 정도는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기와집이 아닌 초가집을 샀다고 가정할 경우 서민 기준 3간 초가집은 150채 (햇님과 달님이 살던 초가집 수준), 그보다 좀 여유가 있던 초가집은 약 100채 정도 (우렁각시가 살던 초가집 수준)는 살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70년대에만 해도 100만원이면 서울에서 집을 샀는데 심청이는 조선시대 당시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한 약 1억 원대 정도를 (초가집 100채 가격) 받았다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여기에 이자까지 감안해 자금 운용을 했다면 지금 기준으로도 100억 원대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현재 로또 복권 1등 평균 당첨금이 약 20억원대로 로또 복권 1등에 4번은 당첨되어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이며 쌀을 1냥 가격으로 환산해 당시 기와집, 초가집 시세와 엮어 집 1채를 소유한 개념을 갖고 부동산의 가치로 비교하면 100억 원대 부동산을 보유한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인당수 제물값

아파트를 7채, 구축빌라를 150채 받지 않고 서울에 집을 딱 1채만 보유하고 (중대형 신축 아파트) 나머지는 연금식으로 (연금복권처럼) 분할하여 지급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20살 성인이 되고 난 직후부터 평생 죽을 때까지 아무 일도 안 하고 평생 놀면서도 월 현금 1,000만 원 (세후) 수령을 해야 이 정도 값이 나온다. (지급되는 돈보다 운용되는 자금이 더 많아 이자만 해도 상당하기 때문). 결론적으로 심청이가 받은 공양미 300석은 생각보다 꽤 큰돈이며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엄청난 대가를 받은 거라 볼 수 있다. 연봉 1억원을 받아도 100년을 벌어야 하는 금액이다. 더군다나 심청이 설화를 보면 심봉사는 결국 눈을 뜨고 심청이도 황후가 된다. 심청이의 효심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그리고 하늘이 효심에 대해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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