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동차 시발 자동차 그리고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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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자동차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동차 시발 자동차 그리고 김영삼

by 깨알석사 2016.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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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군용 지프 윌리스

그 차의 엔진을 가지고 모양을 본떠서 드럼통으로 차체를 만들어 시제품을 만들었던 시바-ㄹ 자동차

차의 이름 자체가 시작(시작+출발)이다. 이 차로 인해서 국산차에 대한 욕구가 생겼고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에 큰 획을 긋는다

한 사람의 의지와 욕구, 국산차라는 자부심으로 만든 차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개발자의 정신은 그대로 남아

지금 대한민국 자동차는 세계 곳곳을 누비는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함경도 아바이 라는 별명을 가진 엔진 기술자 김영삼

최무성이 만든 국제차량공업사라는 자동차 정비회사에 취직하게 되고 그로부터 역사는 시작된다. 

어째 등장 인물들이 ....정치인 이름하고 다 비슷하다...@@;;;

나사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나라에서 자동차, 그것도 국산 엔진을 만들자는 말에 매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김영삼의 주장을 거부한 최무성, 하지만 김영삼의 우려대로 미군에서 나오는 폐차 부품이 줄어들자 그 의견은 받아들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미군 지프차에서 떼어 낸 미군 지프 엔진에 드럼통으로 차체를 만들어 껍데기만 국산이고 알맹이는 모두

미제인 시발차를 만든 것으로 알지만 김영삼은 처음부터 엔진 자체를 국산화 하려고 노력했다. 미군에서 나오는 폐차 부품, 특히

엔진 자체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미제 엔진을 틀에 넣고 모양을 떠서 복사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틀을 만들기 위해 미제 지프차에서 얻은 엔진들을 틀에 넣고 틀 모양을 먼저 만든 다음에 틀이 완성되면 거기에 쇳물을 부어

동일한 엔진 틀을 뽑아내려고 한 것이 가장 첫번째 일, 그 외 엔진의 세부 구멍은 직접 뚫어 만들게 된다.

하지만 엔진을 만드는 족족 다 박살난다. 엔진 내부의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엔진에 금이 생기면서 깨지는 것

모양만 똑같이 만들고 재질만 똑같이 하면 동일한 엔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단순하지 않았다.

당시에 엔진을 만드는 비용이나 그 엔진이 파손되어서 버려야 하는 비용이나 엄청난 부담인 건 사실이다. 그만큼 어려운 고난의 시기

열처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다시금 도전, 연속 주행에서도 엔진이 멈추지 않고 잘 작동하는 테스트를 무사히 마치게 된다.

비록 미제 엔진을 따라 만든 복사품이지만 한국인들 손으로 직접 틀에 붓고 깍아서 만든 국산 엔진이 완성된 것이다.

10번의 엔진을 버리고 11번째 엔진에서 드디어 완성품을 개발 하는데 성공한 김영삼

그는 그 기쁨을 글로 남겼는데 그 문서는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아멘, 할렐루야~라는 마지막 문구에서 그의 기쁨과 환호가 느껴진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우리에게 자동차 생산은 말도 안된다는 우려 속에서도 끝가지 개발에 박차를 가한 김영삼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상용화된 국산차 시발차를 완성해 대중에게 공개하고 정부와 대통령은 소식을 듣고 기뻐서 이 차를 만나러 찾아오게 된다.

1963년까지 2200여대를 만든 김영삼, 자신이 만든 국산 엔진으로 이렇게 많이 만들었으니 대한민국 대표 기술자로 추앙 받을만하다.

하지만 ..............

이런 국산차의 열풍과 자동차에 대한 시장성이 확보되면서 자동차도 생산/판매가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고 결국 다른 사업자들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시발 자동차는 경쟁사의 더 좋은 자동차에 밀려나게 된다.

일본에서 100% 수입해 만든 차에 경쟁력을 뺏긴 시발차는 그렇게 한순간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무엇보다 시발차가 경쟁력에서 밀려난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국산 엔진..고장이 잦고 엔진이 멈추는 일이 생기면서 경쟁 제품이 

없을 때는 그냥 고쳐서 타면 되었지만 더 좋은 경쟁사의 자동차가 생기면서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버린다. 

지금이야 마이카 시대지만 당시에는 운수업자나 특정인들이 타는게 자동차, 시발차도 시발택시로 이름을 먼저 날렸듯이 운수업의 영향이

컸는데 개인 오너 드라이버가 아닌 사업자용 자동차라면 시동이 안 걸리거나 중도에 차가 멈추는 건 치명적인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시발차와 자동차 회사인 국제차량공업사는 다른 자동차 회사와 자동차들에 밀려나게 된다.

그 이후에도 김영삼씨는 엔진 개발과 자동차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도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야인처럼 산업 노선의 

중추적인 역활로 재기하지는 못했다. 직접 개발하고 만들려기 보다는 수입해서 쓰기 바쁘던 당시의 분위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대자동차, 현대차의 쏘나타 시리즈에서 NF 쏘나타가 순수 100% 전 모델에 국산 엔진을 장착하고 그 이전까지는

 일본 엔진을 쓴 것처럼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한 돈과 기술이 드는 자체 개발 보다는 기술 수입과 제품 수입이 더 만연했던 시절이고 

그만큼 김영삼씨의 노력은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백발 노인이 되어서도 엔진 국산화에 노력한 김영삼씨의 생전 모습

현대자동차 포니를 가지고도 열심히 연구했던 백발의 노인

그가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건 다름 아닌 "전기 자전거"

그의 행동과 철학, 죽는 날까지 그가 남긴 말을 보면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을 연상케 한다.

결국 현대차도 우리나라 자동차를 국산화 하는데 일등공신 역활을 했고 도전 정신은 여전한데 비슷한 점이 많다.

오로지 "자동차" 하나만 바라본 사업가(사업가의 기질) 보다는 연구자에 가까운 것이 현대 정회장과 김영삼씨를 가른 유일한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동차 연구개발 외골수가 아닌 사업을 통해 그 돈으로 연구 개발을 하겠다고 했으면 제2의 현대차 주인이 되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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