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몰락 위기 요인이 될 수 있는 영화 -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a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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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리뷰

국가의 몰락 위기 요인이 될 수 있는 영화 -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a Nation)

by 깨알석사 2017.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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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도 거창한 <국가의 탄생> 어떤 포인트가 국가의 탄생과 연결된 점이고 무엇이 국가의 탄생을 이야기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 있지만 1915년 동일 제목의 다른 영화 <국가의 탄생> 영화를 뒤엎기 위한 반대 진영의 이야기라 제목 자체는 큰 연관성이 없다. 

물론 미국이라는 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남북전쟁과 흑인노예 해방이 줄거리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현재 미국 사회를 만든 실질적인 국가의 탄생 시발 포인트라고 볼 수도 있어 제목이 주는 이중적인 의미는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인종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동일한 제목으로 나뉜 이 영화도 마찬가지 그런 형태에 놓여져 있다. 1915년 백인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의 탄생>은 흑인을 나쁜 인종으로 다루고 백인의 입장에서 그려냈다. 반면 2016년 흑인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의 탄생>은 백인을 나쁜 인종으로 다루고 흑인의 입장에서 그려내어 되받아친다.

영화는 논란거리가 많다. 아직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사회 문제를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지금도 미국 사회에서, 혹은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여전히 흑인이 노예처럼 취급 당하고 노예처럼 비하의 대상이 되면서 깜둥이 그 이상도 이하도 존재로 취급 받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흑백논리로 대두된 여러가지 사건들처럼 흑인과 백인간의 갈등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부분들이 많은 시점에서 국가의 탄생이라는 영화는 현재 미국이 처한 사회 문제와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 없기에 한 편으로는 국가의 몰락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요소들을 영화 소재로 삼아 표현하고 있다.  

영화의 메세지를 잘 이해하고 납득하면 화합이고 다른 식으로 해석하거나 백인, 흑인 모두 과거의 시절에 젖어 그 때의 생각과 이념으로 접근한다면 그들만의 위험한 리그는 시작될 것이고 결국 영화는 불씨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먼저 나왔던 1915년작 국가의 탄생 영화는 KKK단의 백인우월주의 단체 영향을 많이 받은 영화다. 원작이 되는 소설이 그랬고 소설을 쓴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활동성을 잃고 힘을 잃어가던 KKK단에게 이 영화는 큰 영향을 끼쳤으며 소멸되어 가던 KKK단에게 하나의 활력소가 되면서 현재의 KKK단이 활동할 수 있는 토대와 양분의 제공한 역할을 했다.

1915년 백인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의 탄생>이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하나의 희망처럼 되어버렸다면 반대로 2016년 흑인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의 탄생> 역시 흑백논리와 인종차별에 대한 투쟁과 혁명을 내세워 흑백은 원래부터 하나가 될 수 없고 흑백은 같은 색이 될 수 없다는 이념 논쟁에 빠져 흑인들 내면에 감추어진 파괴된 자존심과 열망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실제 영화에서도 흑인들은 들고 일어나며 백인 농장주들을 모조리 죽인다. 위태위태한 내용이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기 때문에 힘은 강력하다. 이런식으로 최근 들어 다시 부각되고 있는 미국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를 다시 불러 일으키고 흑인과 백인 친구들 사이에 문제를 발생 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만들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지만 그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되며 발언의 힘이 빠질 수 밖에 없다.

시비를 걸기 위해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지어낸 창작의 테두리에 있는 작품이 아니라 진짜 이야기를 현재 다시 다룬 다큐의 테두리로 작품을 넣게 되면 그것에서 보고 배울게 분명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깔 수만은 없게 된다. 허구에 기반한 이야기는 망상이 될 수 있지만 실체가 있는 진짜 스토리에는 진실이 담길 수 있어 맹목적으로 비판하기 힘들다.

1915년작 <국가의 탄생>은 시대적 배경과 상황만 실제일 뿐 주요 이야기는 허구다, 그러나 2016년작 <국가의 탄생>은 그 시대에 살았던 한 흑인 노예의 실화이기에 허구가 만든 허상과 선입견에 맞붙어 대결하는데 최적화다.

영화는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어느 흑인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그를 기특하게 여긴 농장 여주인이 그에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 덕에 그는 성경책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성경책을 읽게 되면서 흑인들의 노예 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전도사 역할도 가질 수 있게 된다. 

백인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들이 농장 주인에게 불만을 가지더라도 하나님에게는 불만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 그를 흑인 노예들의 불만을 줄이게 만들 수 있는 전도사로 활용하게 되며 그는 전도사 활동을 하면서 여러 농장의 다른 흑인들이 엄청난 고통과 핍박을 받는 걸 목격하게 된다. 

글을 몰랐거나 읽을 줄 몰랐거나 성경을 몰랐거나 전도사 활동을 못했다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자신의 농장 전부였기 때문에 다른 노예들의 삶을 엿보는 기회는 없을 수 있었는데 전도사 활동이 그에게는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 같은 흑인 노예들이 다른 농장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본 그는 결국 마음 속에 쌓인 울분과 응어리가 결국 후반에 터진다.

주인공 옆에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백인 도련님이 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고 도련님 스스로 친구라고 여기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가 이 아이를 좋아했고 어머니가 직접 공부를 시켰기 때문에 똑똑한 노예로서의 유용한 가치의 대상이 될 뿐이고 자신의 농장에서 이 친구 하나 때문에 별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서 노예들의 불만과 불평을 기독교라는 종교로 덮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잘 해줄 뿐이다.

주인이 주인공 흑인 노예를 특별대우, 남다른 대접을 해주는 것도 경제적 논리에 주관한 생각일 뿐이고 가문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흑인 노예가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어서 대우해 주는 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이용할 뿐 그 이상의 가치나 관계는 없다. 그런 관계를 너무나도 잘 알아서인지 주인공은 농장주들을 처벌하고 도살할 때 자신이 직접 이 주인을 처참하게 죽인다. 굳이 둘 관계의 깊이를 살펴 볼 이유가 없고 해석할 이유도 없는 원래 별 사이 아닌 공생관계였음을 증명한다.

영화에는 자본주의와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와 지역 이기심, 경제적 가치와 자본의 논리에 따른 부작용 등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골치거리를 믹스해 담아낸다. 흑인 여자는 가지고 놀 수 있는 대상이고 백인 여자는 그렇지 않다는 모양새지만 실상은 백인이든 흑인이든 여자는 물건처럼 매매가 되고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팔려가는 건 비슷하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흑인이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과 여자가 자유인으로 사는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는 백인 여자에 대해 그런 것들을 크게 다루지 않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들로 채워 넣어 한 쪽만의 일방(흑인)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하나의 큰 축은 종교다. 종교가 없으면 이 영화는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리고 그 메세지 역시 강렬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가치가 크다. 신이 있기 때문에 (영화 후반) 벌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신이 없기 때문에 (영화 초반) 벌어지는 이야기다라고 서로 맞물려 이야기할 수 있는 포인트가 매우 많다. 

흑인의 입장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라거나 백인의 입장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서로 맞물려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며 신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과도 별 차이도 없다. 종교라는 이름과 흑인 노예라는 신분 사회, 그리고 그 종교를 어떤 식으로 이용하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만 달라 질 뿐이다.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도 불편 할 수 있고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도 불편 할 수 있는 영화다, 종교가 가진 힘에 대해 영화를 보고 호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종교가 가진 힘에 대한 부작용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게 만든다.

미개함의 본질은 무엇이고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도 무섭지만 티 안나게 다룬다. 전도사로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주인공에게 할아버지가 했던 방식의 토속신앙 굿 형태와 의식행위는 사람이 같지만 백인과 흑인처럼 피부색이 달라 서로 다른 부류처럼 나뉘는 것처럼 종교의 본질은 같지만 의식행위와 믿는 신의 차이로 서로 다른 부류로 나뉘는 것과 다름 없음을 설명한다. 종교에도 위 아래가 있고 자신들이 믿는 신(=피부색)에 따라 생각이 완전 달라 질 수 있음도 물론이다.

미국은 여러 인종이 함께 어울려 사는 대표적인 국가다. 특히 흑인과 백인으로 가장 많이 분류된다. 친구들도 인종 구분 없이 서로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 영화를 흑인/백인 친구들이 함께 본다면 서로 어떤 감정이 생기고 변화가 생길까? 과거의 이야기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고 영화 속 이야기지만 현실의 흑백논리에 따른 인종차별은 여전하기 때문에 함께 본 다양한 피부색의 친구들은 혼란스러움이 클 수 밖에 없다.

무엇이 잘못 되었고 무엇이 문제인 것을 안다면 조화의 또 다른 계기가 될 수 있지만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문제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한다면 역시 기름과 물처럼 어울릴 수 없는 관계로 치부되면서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1915년작 <국가의 탄생>에서 이미 그 부작용은 확실히 나타났다.

영화가 전달하는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도 "종" "노비"라고 불리우는 사실상의 노예와 비슷한 신분이 있던 나라다. 그러나 우린 색으로 구분하진 않는다. 민족을 따지지도 않는다. 다만 출신 성분과 그 사람의 가문을 보고 신분을 따졌을 뿐이다. 

또한 노비는 댓가를 받고 일하는 종속관계다. 신분은 주인에게 귀속되지만 (노비문서) 평민, 자유인들에게 괄시의 대상이 되거나 핍박 받는 대상은 아니다. 주인과 함께 있는 집의 문 밖을 나서면 시장이든 길거리든 평민과 다름 없다. 길을 비켜주거나 평민에게 우선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로 구분할 뿐이다. 

그러나 우린 뜻밖의 다른 세상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일제강점기다.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으로 나뉘고 둘이 하나의 국가로 합쳐지면서 (한일합병) 일본인 주인과 조선인 노예 신분으로 살아간 적이 있다. 영화에 나오는 노예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고 조센징이라 불리우는 민족차별은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이라는 단어 명칭만 다를 뿐 형태는 같다.

그들이 때리면 맞고 다른 조선인들은 구경만 해야 했다. 끌고 가면 끌려가고 일을 강제로 시키면 강제로 해야 했다. 흑인 노예 여자들처럼 조선 여자라는 이유로 그들 마음대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는 사람이 어느 나라사람이고 어느 민족이고 어떤 입장이냐에 따른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이 같은 걸 이야기 한다고 할 수 있다.

백인을 일제 강점기 당시의 일본인으로, 흑인을 일제시대 조선인으로 바꿔 영화에 투영 시켜도 크게 어색하지 않게 느끼는 건 차별이라는 것이 갖는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할 때 다른 나라도 침략을 했다. 물론 식민지 국가로 그들을 지배했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은 같다라는 한일합병처럼 하나의 국가로 삼지는 않았다. 그냥 지배국가와 식민국가로 나뉜 별개의 국가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우린 그렇지 않다. 그들과 강제합병을 통해 영화 속 사람들처럼 하나의 울타리에 함께 사는 공존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그들이 하라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그들이 하는 언어와 문화를 강요 받았다. 

동남아를 비롯한 중국조차 경험하지 못한 진짜 차별을 우리는 흑인 노예와 다름 없이 경험한 적이 있기에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불편함의 강도는 쎄진다.

식민국가의 국민을 대상으로 차별하는 건 노비와 같다. 적은 댓가로 오히려 많은 일을 시키고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으며 내 허락 없이는 다른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노비와 노예는 완전 다르다. 노비와 노예 모두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노비는 마음대로 죽이거나 물건처럼 취급할 수 없다. 또한 노비는 능력과 실력만 되면 얼마든지 다른 삶을 살 수 있고 그렇게 해준다. 일제 시대를 떠나 우리 역사에서도 노비 출신 장군이나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나 노예는 노비와 달리 마음대로 해도 된다. 영화처럼 죽여도 되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도 된다. 어린 백인 소녀가 같은 또래의 흑인 노예 소녀의 목에 개줄처럼 목줄을 달고 노는 것처럼 인간 취급 자체를 하지 않는게 노예다. 노비가 있던 우리 역사에서도 사람 목에 개줄을 달아 노는 양반은 없던 것처럼 노예라는 계급 사회 자체가 끔찍한 이야기다.

영화는 그 끔찍한 상황이 불과 200년 전의 미국 이야기지만 그게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닫고 흑인 백인이 모두 다 함께 어울려 사는 지금의 미국 사회를 만들었음에도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1915년 <국가의 탄생>이라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영화가 바로 그 불씨고 그로인해 아직도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괴롭히는 KKK단과 같은 조직들의 건재함이 바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2016년 <국가의 탄생>이 단순히 역공을 위해 만들어 진 영화라고 보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들을 척결하고 백인을 역으로 탄압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잘못된 생각, 잘못된 선입견과 차별주의, 바로 그걸 뒤엎기 위해 다시 같은 동명의 제목으로 기존 영화를 눌러버림으로 인해 원래 미국 사회가 추구한 가치와 이념을 벗겨진 곳에 새롭게 덮으려고 했다고 봐야 한다.

포장지가 벗겨져 잘못된 내용물이 흘러 나왔으니 다시금 새롭게 만든 포장지로 벗겨진 부분을 메우고 잘못된 부분을 오려내어 더 이상의 불량품이 생산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상대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허구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는게 중요하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나 KKK 같은 집단은 십자군 형태의 종교적 색채로 사람들을 모집하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그들의 모습 자체가 이단교 같다. 영화도 똑같다. 흑인 노예 사회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뭉치고 종교적인 색채로 조직이 완성된다. 그리고 종교의 힘으로 백인 주인이 아닌 하나님이 주인인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백인들과 싸우고 농장주들을 처벌한다. (종교와 하나님이 없었다면 영화 속 실화 주인공은 겁 없이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 상반된 진영의 모순된 이야기지만 영화를 떠나 실제로도 (실화 구성) 흑이나 백이나 방식은 같다. 다만 한 쪽은 절대악이고 다른 한 쪽은 그 악에 의해 고통받고 피해를 본 자들의 절규로 인한 반박인데 이들이 취하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 

아내가 눈 앞에서 겁탈을 당해도, 다른 사람의 노리개가 되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그것보다 더한 악몽은 없다. 무엇 때문에 살고 왜 살아야 하는지를 되묻게 되지만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자존심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냥 단지 가족이 오랫동안 다른 피해를 받지 않고 곁에서 함께 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우리의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이도 다르지 않다.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처럼 조선 여자들이 끌려가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입장이 컸다. 그리고 데리고 가는 모습을 그냥 묵묵히 바라보고 눈물을 삼켜야 했다. 왜 살고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면 그건 "부모님, 가족, 형제"가 있는 고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냥 살아서 내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전부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건 몹시 불편하고 우울하다. 

그나마 나은 삶과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자유로운 집사 역시 흑인이다. 영화에서는 완전 흑인처럼 나오진 않지만 백인 사회에 귀속되어 그래도 흑인 노예 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는 걸로 보인다. 노예 흑인의 입장이 되어 보면 우리 입장에서는 친일파나 일제에 협력한 방관자들과 다르지 않다.

백인 농장주들에게 반항을 하고 백인들과 싸우려고 하는 것이 곧 흑인 노예 전체를 모조리 죽이는 꼴이라고 반박하며 주인공의 행동이 잘못 되었음을 말하는 집사의 대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싸우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무모한 행동이라 여기며 설령 그런 일이 지속될수록 조선인들이 더 많고 괴롭힘 당하는 꼴이라고 말하는 자들과 같은 위치라고 볼 수 있다. 

보이는 현실이 잘못된 건 맞지만 그걸 고치려는 건 쉽지 않고 때로는 무모할 수 있다는 것인데 맹목적으로 그들에게 협력하고 동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민족과 인종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했던 발언이기 때문에 무조건 흑인 노예에 동조하지 않는 나쁜 흑인으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때로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수수방관하고 모른척 해주는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영화에서도 비밀 모임을 가졌다는 걸 집사가 알지만 반대하고 말리긴 했어도 그런 사실을 농장주에게 말하는 장면이 없고 농장주가 처단 당할 때도 몰랐던 걸로 보아 어느쪽에도 협조하지 않는게 때로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기에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과 노력은 충분했다고 본다.

의도치 않게 우리시대상과 맞물려 설명을 많이 하게 되었지만 실제로 비슷한 점이 많다. 백인 농장주들의 괴롭힘과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흑인 사회에서 하나님의 등장은 굉장한 힘이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제시대로 들어가면서 기독교, 천주교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많은 고통 받는 자와 핍박을 받은 국민들이 흑인 노예 사회처럼 종교에 희망을 걸고 의지를 했다. 

그리고 흑인들이 벌인 반란처럼 우리도 종교의 힘으로 뭉쳐 독립운동과 민족부흥 운동을 꾸준히 했고 결과적으로 비슷한 포지션으로 미국의 흑인 노예 해방처럼 우리도 결과적으로 민족해방, 광복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그들이나 우리나 결국 주인과 노예 관계가 청산되고 자유가 보장되는 원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종교만 놓고 봐도 할 이야기가 많고 논쟁거리가 많다. 다른 사람과 토론을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소재도 많다. 흑인 노예 사회의 주도세력인 기독교는 당시에 백인 사회에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종교를 가졌지만 백인 목사와 흑인 전도사의 기독교 정신은 주인과 노예 입장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흑인 전도사가 어느 교회도, 그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백인 범죄자에게 세례를 했다는 이유로 매질을 당하면서 백인 목사와 성경구절로 랩 배틀을 하듯이 대결하는 장면이 바로 종교의 이중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같은 성경과 같은 종교적 윤리로 삶을 살아가는데 흑인 노예는 종교를 가질 수 없다면 모를까 같은 종교를 가진 종교인들끼리 어찌 이렇게도 다른 윤리와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며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이해심이 다를 수 있는지 처참하게 보여준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백인이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 가르침이나 흑인이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 가르침이 같을텐데 백인은 하나님과 인간의 종속관계, 주인(신)과 인간(종)의 관계를 가지고 백인 주인과 흑인 노예를 관계로 받아들여 성경 구절을 해석하고 흑인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정말 꿈보다 해몽이 좋은 해석이다.

영화는 잘못 이해하면 오해의 소지가 크다. 영화처럼 칼과 총을 들고 백인들을 처단해야 하고 흑인들만의 사회집단을 구성해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백인 입장에서 그려진 <국가의 탄생>에서 백인우월집단인 KKK가 활성화 된 것처럼 이 <국가의 탄생>을 잘못 이해한 흑인집단은 그들만의 잘못된 집단을 만들 수도 있는 법이다. 이미 우리는 백인/흑인 간의 문제로 벌어진 유색인종 차별 문제에서 의도치 않게 피해를 본 적이 있다. LA폭동 사태다. 

백인 사회 집단에 대해 직접적인 욕구 불만 해소가 안되는 상황에서 불미스러운 오해로 아시아인에게도 인종차별을 받았다는 오해가 흑인 사회에 퍼지면서 결국 LA폭동이 터졌고 흑인들은 한인들 사회에 그 화풀이를 대신 했다. 백인 사회가 직접 피해를 본 것은 아니지만 결국 어떤식으로든 두 진영간의 풀리지 않는 앙금은 여전했다는 말이다.

1915년작은 잘못된 인식과 왜곡으로 만들어진 엉터리 영화라는 평을 받는다. 물론 대흥행은 했지만 흥행과 상관없이 졸작이라는 평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그런 왜곡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지금 미국 사회를 보면 아는 것처럼 이 영화도 잘못된 해석과 왜곡이 우월하게 되면 미국 사회를 더 혼란에 빠트릴 개연성이 매우 높다.

영화는 자본주의, 경영자와 노동자의 계급 사회로 투영이 가능하다. 위아래, 주인과 종의 관계가 성립되는 모든 관계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적은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고 열악한 복지와 엄청난 생산량을 요구하면서 노동자의 인권이나 삶은 관심 밖이고 오로지 노동력에만 몰두하는 경영자의 삶이 백인 농장주이고 무조건 하라는대로 따라해야 하며 시키는 것만 해야 하는 고통 받는 노동자의 역할이 흑인 노예 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그려낼 수 있다.

흑인 노예들의 반란을 일으키는 장면이 노동자의 시위 현장과 다름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본주의에 농락당한 사람들이 원하는 해방주의,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동일하며 같다는 평등이 지배하는 사회, 차별하지 말고 주인과 종으로 구분하지 말고 정당한 댓가로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영화 제목처럼 새로운 국가의 탄생 개념이 성립 가능하다. 물론 그런 국가의 탄생은 차별 없는 새로운 세상이라 쓰고 자유진영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라고 읽는다.

백인 입장에서 만들어진 1915년작이 사회주의에서 미국 사회를 단면을 지적하고 사회의 모순성을 고발하는 영화로 대접 받았던 것도 흑과 백의 위치와 입장만 다를 뿐 결국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는 세상과 영화의 이야기가 가고자 하는 이야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백인우월이 심했던 남아공에서 국가의 탄생(1915년작)을 좋아라 했던 건 백과 흑의 갈등에 관한 인종차별주의 때문이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이 국가의 탄생을 좋아한 이유는 이런 내용 때문에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하기 쉽고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용하느냐에 따라 좋은 이야기도 나쁘게 될 수 있고 나쁜 이야기도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서로 원하는 방향대로 해석하고 이용할 뿐이다. 지구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 이념이 달라 완전 다른 사회가 공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한끗 차이라는 말이다. (우리와 마찰을 빚고 있는 중국이나 북한만 보더라도..)

종교 이야기가 많지만 종교 영화는 아니고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딱 잘라 인종차별에 관한 것만 다루었다고 볼 수도 없다. 다른 수 많은 인종차별, 흑백갈등 영화와 다르다. 단순히 색으로만 서로 나누어 설명하진 않는다.

과거의 이야기지만 현재에도 통용되는 이야기고 현재의 이야기와 많이 닮았지만 앞으로도 미래에 영원히 풀지 못하는 숙제로 인종차별은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느낌도 부정하긴 힘들다.

안 봤으면 몰라도 보면 고구마 100개 먹은 것처럼 가슴 한 켠이 답답한 이야기다. 그게 영화가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다루는 주제가 풀기 힘든 난제라 답답함이 먼저 다가온다. 애초에 서로 같은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사는게 순리고 진리지만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강제, 강압 (아프리카 노예) 에 의해 다른 세상으로 퍼져나간 인종은 절대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신이 있다면 (나는 무신론자) 애초에 백인, 흑인, 황인으로 나누어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들이 주로 사는 지역을 아예 정해놓고 처음부터 함께 섞여 살게 만들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국 그걸 어기면 답이 없다. 색과 지역에 맞춰 문화도 서로 다르게 발전했고 삶의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데 그게 하나의 공간에서 공존한다면 색으로 인한 차별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거라는게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영화는 생각할 것도 없이 깔끔하게 10점 만점에 10점, 수우미양가에서 "수", 종교와 피부색을 떠나 인간 본연의 삶과 윤리,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르침이 분명 있다. 노동자의 시선으로 보든, 경영주의 시선으로 보든, 강자로 군림하는 남자의 시선으로 보든, 약자로 여겨지는 여자의 시선으로 보든, 기독교와 반기독교, 이슬람교와 IS와 같은 전혀 다른 이슬람 세력들처럼 어떤 입장에서 어떤 주관적인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 질 수 있는 영화다.

제작자이자 연출과 각본까지 직접한 주인공으로 나온 네이트 파커의 사생활 (대학생 시절 강간혐의/무혐의 무죄로 종결/상대 여성은 최근 자살)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도 이 영화가 갖는 언발란스하고 다양한 논쟁의 주요 소재가 아닐까 싶다. 영화의 메세지나 그가 하고자 하는 영화 속 이야기의 진실성에 대해 말이다. 1915년 작품이나 2016년 작품이나 다를게 없다는 꼬투리가 될 소지가 있는 법이다.

그가 제작/연출/각본/주연까지 했고 직접 이야기를 담아 만들었지만 그 영화에는 그런 사생활과 대적될 만한 장면도 있다. 타인에게 행해진 강압과 강제적인 내용이 영화의 큰 틀인데 그의 사생활은 그런 강압에 대한 내용을 말하기 힘든 자격이라는 건 분명 논쟁이 될 수 있다. 사생활과 관련해 피해를 준 사람이 영화 속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참고로 공동집필을 한 친구 역시 공범으로 재판을 받아야 했고 2심에서 무죄) 

같은 종교라도

색이 다르면 다르게 보고

색이 같아도

종교가 다르면 다르게 본다. 그게 인간이고 우리 모습이다

행복과 웃음이 가득할 것 같은 스머프 마을에서 스머프 한 명이 노란색이라고 해봐라. 파파 스머프가 있어도 결국 스머프 사회에서도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과 사회 문제는 분명 있을 확률이 높다. 피부색을 따지지 않고 서로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된다고 해도 미국 커플 다수를 보면 백인은 백인끼리 부부가 되고 흑인은 흑인끼리 부부가 된다. 다른 유색인종 (백인 남편/흑인 남편의 아시아인 아내 등) 커플은 많아도 백인 남편 흑인 아내는 의외로 보기 힘들다. (물론 비욘세 같은 경우라면 예외지만 ^^)

무조건 같이 사니까 문화나 기준 따지지 말고 어울리자고 하는 것 보다는 서로 보는 관점과 기준이 다르다는 걸 애초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주인공이 사형 집행을 당할 때 눈 앞에 보인 블랙 엔젤, 검은색의 천사가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천사가 만약 일반적인 화이트 였다면 진짜 이 한 장면으로 개망작, 결국 흑인 노예 사회의 주님은 흑인이라는 것도 짐작이 가능하다. (흑인 노예 입장이라면 당연하겠지만..) 우리쪽으로 이해시키려 하지 말고 각자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알아서 선택하게 하면 될 일..결국 우열 관계에서 어차피 열세한 쪽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법이다.

잘 해석하면 새롭고 더 강한 미국 사회가 거듭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고 영화 속 이야기만 보고 똑같이 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들었다면 미국 사회가 몰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영화다, 국가의 탄생이 곧 국가의 몰락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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