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남북이 서로 지원을 했던 1984년 대남/대북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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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남남북녀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남북이 서로 지원을 했던 1984년 대남/대북지원

by 깨알석사 2016.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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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장마철이 오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가 바다가 되었을 정도로 많은 비가 왔는데 기상청이 생긴 이후로 가장 많은 비가 온 것으로 기록되었을 정도로 우리나라 한반도에 비로 인한 대홍수, 물난리를 겪게 만든 시기다.

이 때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한에게 물자지원, 수재민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고 결국 합의가 되어 북한에서 공식적인 수재민 지원 물품이 도착하게 된다. 쌀, 시멘트, 의료품 및 기타 품목 등이 판문점 육로와 해상을 통해 우리나라 항구로 들어왔다.

화해 무드를 조성하고 평화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많이 갖기도 했지만 이후 지속적인 교류 없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이 대남지원을 담당한 건 김정일이다. 당시 우리나라 대통령은 전땅크. 

북한 주민들 먹을 쌀도 없는데 북한이 남한을 도와줬다고? 사실 이 부분은 맞다. 당시에도 남한이 더 잘 살았다.

당시에는 순수한 의도로 북한이 남한에게 수해민, 이재민 지원을 해 준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진 않다. 상식적으로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남한과 북한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국토가 완전 분리되어 섬과 대륙으로 나뉜 것도 아니다. 서울 수도권이 물난리가 났고 충청도까지 물바다라면 그만큼 서울과 가까운 북한, 평양 주변도 폭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단순하게 보면 남한에서만 물난리가 난 걸로 생각하지만 물난리의 원인이 "기습적인 폭우"였기 때문에 1시간 거리 밖에 안되는 북한 지역도 난리는 마찬가지다. 이 때 남한은 북한을 도와주고 대북지원 물품을 보내주겠다고 한 것만 보더라도 북한도 만만치 않게 고생 중이라는 건 알 수 있다.

그런데 남한의 제의를 북한은 거절한다. 별 일 없수다! 우리는 물난리 안 났수다~ 하고 콧방귀를 뀐다. 그리고 쿨하게 니들 난리난 거 아는데 우리 북한이 반대로 남한을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 바로 84년 대남지원이다. (우리에게는 대북지원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대남지원은 거의 듣기 힘든 말)

우리는 남한 도움을 거절 했으니 남한도 우리 북한 제의를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정설, 88 올림픽이 4년 후에 열렸는데 당시 나라 모습을 보더라도 우리나라 수준이 북한보다 압도적이다. 그런 잘 사는 남한이 북한의 원조를 받는다면 자존심이 상할 것이라 생각한 북한은 쿨~하게 도와주겠다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전땅크가...제의를 받아들인다!. 당황한 건 북한, 거절할 것으로 예상하고 말만 했던 건데 진짜로 보내줘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서 뻥이야~ 이럴 수도 없는 법,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된통 호되게 당한 상황이 되버렸다. 실제 당시 북한 관련 기록들을 보면 남한의 수락 제의에 당황해 북한 각 지역에서 물자를 급 징발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처음부터 준비도 안되었고 북한도 식량난과 전력난이 워낙 심하던 시절이고 우리는 일시적으로 수해를 입은 것이지만 북한은 수해와 상관없이 형편이 좋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아야 할 쪽이 말 한번 잘못 했다가 도움을 줘야 할 상황이 되버린 것이다.

겉으로는 대북/대남지원 명목으로 평화적이고 인도적인 지원이었지만 사실 이건 정보기관 싸움, 북한의 보위부와 남한의 안기부 싸움으로 물품을 보내는 북한은 보낼 물자가 곧 북한의 생활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잘 보내야 했고 또한 기왕 보낼 때 왕창 보내서 제대로 받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남쪽 안기부에서는 국가 체면도 있고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미비한 점이 생기면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생기는 일이라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사실 그래서 1984년 대남지원은 대표적인 정치쇼 중 하나로 뽑히기도 한다. 쌀이 당장 없어서 못 먹는 상황도 아니었고 북한이 보내준 대규모 시멘트는 사실 남한쪽에 남아 돌아 여유분이 넉넉한 상황이었다. 우리 시멘트도 남아서 덤핑이라도 쳐야 할 판에 북한의 시멘트는 사실 큰 의미가 없고 제약회사가 많은 우리나라와 제약회사라고 딱히 할만한 것도 없는 북한의 의료지원도 84년도 당시에는 큰 도움이 안되었다.

애초에 북한이 이 기회에 남한에게 도와주겠다고 한 것 자체가 큰 소리 한번 칠 생각이었는데 전땅크가 북한의 대남지원을 OK 한 것 자체가 자존심 싸움이다. 더 잘 사는 집안에 "우리가 함 도와줄께~" 큰 소리 한번 쳐 본 것이고 더 잘 사는 집에서는 역으로 "그래? 니 집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을텐데 그럼 함 도와줘봐~ 바지 가랑이 찢어지게 만들어 주께~"가 된 것이다. 지원 받을 곳이 없어 하필 북한에서 받겠냐라고 자존심 때문에 거절 할 줄 알았는데 OK를 해버리니 북한은 또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제대로 보내야 했던 것이다.

북한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대형 벌크선들을 회항 시켜야 했고 (이동수단조차 준비가 안됨) 북한 전역에서 물품을 징수해 일일이 포장해 보내야 했다. 판문점으로 들어온 물품의 경우 인수 작업시 남한쪽에 무리가 있을 것이라고 북한이 예상했으나 최첨단 기술(?)인 컨베이어 벨트가 등장해 트럭이 노후된 북한쪽이 더 당황했다는 건 다 아는 사실. 물량 공세를 하면 당황해서 허겁지겁 할 줄 알았던 남한이 물량 공세는 커녕 후속으로 오는 북한 트럭을 기다려야 상황이 되자 육상, 해상 모두 참패를 당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답례품으로 30여대 트럭 분량의 "가전제품"을 보내주었다. ㅋ 북한은 거절하지 않고 받아갔다. 정치쇼에 놀아 난 지원이지만 그래도 북한 주민과 남한 사람들에게는 최초의 대남지원이라는 평화적인 기록을 만들었다는 것에 의미를 추가한다.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쌀은 대한민국으로 포장

북한에서 오는 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포장

쌀 주고, 쌀 받는 북한과 남한, 같은 한반도라는 것이 와닿는 부분이다. 같은 한글로 된 포장지에 예나 지금이나 어려우면 "쌀"부터 지원해 주는 문화, 다른 건 몰라도 쌀밥 먹고 굶지는 말라는 뜻이다. 간혹 어떤 분들은 우리나라의 대북지원을 퍼주기라고 하는데 그건 조금 더 깊게 따져보고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언젠가는 "통일"할 것이라는 걸 다 알고 있고 바라고 있다. 무력 보다는 평화적 통일이 되야 하는 건 당연한 일, 독일 통일 상황을 보더라도 통일 주체간의 경제 상황과 괴리감은 크지 않는게 좋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주는 지원도 절대적인 양도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안 주는 것 보다는 낫다. 통일준비를 위해서라도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라도 지원은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낫다.

격차가 크면 클수록, 사회에서도 양극화가 심하면 심할수록 문제가 더 커지고 사회계층에 분란이 생긴다. 찢어지게 못 살고 배터지게 잘 사는 집안들 보다는 가난해도 먹고는 사는 집안과 부자는 아니어도 중산층 되는 집안의 만남이 되야 불화가 덜 하다. 난 잘 나가지만 상대가 너무 못 나가면 적당히 도와주는 것도 맞고 같은 한민족의 한반도인이라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건 기부나 종교의 봉사활동과 차원이 다르다. 정치와도 별개, 정경분리라는 말처럼 정치적인 상황과는 별도로 원래 서로 돕고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이치에 가깝다.

대남지원의 반대인 대북지원, 대북지원 하면 사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정주영 회장이다.

우리나라와 북한의 자주통일을 앞 당기고 남북 화해무드를 조성한 것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많이 꼽고 관련 상도 받으셨지만 정작 가장 큰 일을 해낸 건 정주영 회장이다. 98년 소 떼 방문 자체가 김대중 대통령 정권 시절이 막 시작한 그 첫 해다. 1001 마리의 소라는 의미심장한 소 떼를 몰고 직접 북한으로 가서 화해 무드를 조성했고 금강산 관광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든 것도 현대 가문이다. 

1001 마리의 소에 대해 일부는 1000 이라는 꽉 찬 수에 1마리를 더해 종결이 아닌 새출발을 의미한다고 새로 덧붙이지만 그건 아니고 아버지가 소 판 돈을 가지고 가출한 정회장이 원금 1마리에 이자로 1000마리를 더해 1001마리가 된 것이라 1마리의 소를 가지고 나가서 1000마리를 몰고 고향으로 가면서도 "계산은 정확히 해야 한다"는 정회장의 논리라고 볼 수 있다. (1000마리를 끌고 가면 결국 원금 빼면 999마리가 되기에...) 

유람선 관광을 시작, 관광버스를 통한 육로관광까지 확대했고 결국 자가용을 몰고 직접 관광할 수 있는 자가용 관광까지 만든 것도 현대 가문의 역활이 가장 컸다.

소의 절반은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암소로 준비한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암소는 임신한 상태로 보냈다. 한 마리라도 더 보내주고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정회장의 생각, 소 운반차량으로 쓰인 현대 트럭도 모두 놓고 왔다.

2016년 올해 뉴스에 관련 소식이 나왔는데 98년 제공된 트럭은 현재 모두 사용중이라고 한다. 부품 수급은 그동안 개성공단을 통해 암묵적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개성공단의 남한기업에게 부탁해서 조달) 뉴스로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 트럭이 보낸진 것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당시 영상을 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있다. 정주영 회장이 탑승한 다이너스티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아반떼와 망작이라고 불리웠던 경차 아토즈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북한으로 들어가는 차량 중 자가용들이 꽤 있었는데 현대자동차의 소형차들이었고 돌아온 뉴스는 찾아볼 수 없다. 현대 정회장님이 두루두루 쓰라고 승용차들도 주지 않았나 싶다.

쌀 주고, 쌀 받던 건 어디까지나 일회성, 우리는 여전히 쌀을 주지만 북한은 미사일을 보낸다. 그냥 보내면 상관 없는데 불을 붙여 "날린다"는 것이 함정. 연평도 포격 사건만 보더라도, 천안함 사태만 하더라도 말이다. 결코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이다.

금강산 관광 당시 태극기와 인공기를 유람선에 달아야 하는 문제로 양쪽 모두 고민을 했는데 한반도기로 해결

자가용으로 직접 금강산 관광을 하던 당시의 사진

통일도 중요하지만 경제적인 부분에서 철도는 항상 빠지지 않는 부분, 부산-서울-평양-중국-러시아로 이어지는 철도는 남북 합의만 제대로 되어도 언제든지 실현 가능한 부분이다. 이 하나만 제대로 되어도 관련 산업(물류, 철도인프라)의 급성장은 양쪽 모두에게 큰 이득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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